한국 사회 적응기②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분단의 설움을 느끼고,
통일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글. 홍은향 한겨레고등학교

(지난 호에 이어)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은 정말 즐거웠다. 다만 도덕 시간만은 아니었다.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아이들 입에서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북한을 무시하고 멸시했다. 토론 시간은 더 가관이었다. ‘통일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주제가 나오면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아이들이 통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만 찬성을 하면 이상하게 볼까봐 아이들과 같은 입장에 섰다.

그 시절에는 행복한 나날도 많았지만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숨기고 또 숨겼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짐을 짊어진 것 같았고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 싫었다. 나를 한국이 아닌 북한에서 낳은 부모님도 남몰래 원망하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포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중학교도 일반학교가 아닌 북한이탈청소년들이 재학 중인 한겨레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북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한겨레학교도 처음에는 너무 싫었다.
그런데 점차 마음을 열면서 이곳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마음이 편한 것이었다. 일반학교에 있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무거웠고 언제 들킬지 몰라 늘 불안했다. 하지만 한겨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상황이라 거짓말을 할 필요도, 불안한 하루를 보낼 이유도 없었다. 마음을 열고 생활을 하니 스트레스도 안 받고 마음 또한 편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학생회장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그 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다. 통일 교육을 다니기 전까진 말이다.

신호래 당시 교감선생님과 서울·경기권 학교를 돌아다니며 한 달에 한 번 통일 교육을 했다. 통일 교육을 갈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은 딱 하나였다. 나는 이방인이라는 것. 몇백 명을 상대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두렵거나 떨리지 않았다. 다만 내가 두려웠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 혼자 다르다는 것, 이방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다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다들 이야기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난 북한 사람이고 내 앞에 있는 이들은 한국 사람들이었다. 편견을 버리고 당당해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통일 교육을 여러 차례 다녀왔고, 다녀온 날은 혼자 생각에 많이 빠지곤 했다. 그리고 혼자 되뇌었다. “한국에 살면 한국 사람이고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이방인이 아니야.”라고. 그렇게 19살이 되었다. 이제 곧 20살, 법적으로 성인이 된다. 중학생 때보단 나만의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생각도 많아졌지만, 아직 그때의 그 감정들은 가슴속에 남아있다.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북한 사람에 대한 편견이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괜찮다.”고 다짐하며 앞으로를 바라본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 변하게 될 내 모습이 기대되고, 지금까지 멋지게 툭툭 털고 일어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가기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에 행복한 것들, 행복하지 않았던 것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나는 분단의 설움을 느끼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통일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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