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일까?’ 어린 소태산 대종사의 표정에 의문과 궁금함이 그대로 나타난다. 또 간절하게 구하던 답이 어디에도 없음에 좌절하던 청년 소태산의 얼굴에는 ‘이 일을 어찌 할꼬’ 란 고뇌가 묻어있다. 한국 유일의 소목조각장 김정명(여주교당)의 손에서 새로이 탄생한 소태산 대종사 십상. 고부조 기법으로 조각한 십상은 세밀하고 입체적인 것은 물론, 물 흐르듯 이어지는 11개의 조각작품은 소태산의 일대기를 영상처럼 펼쳐 보여준다. 서울교화 100년 기념사업으로 제작한 ‘소태산 대종사 십상’은 3월 31일 원불교소태산기
“원불교 문화는 전 구성원들의 열린 마음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이명아 문화사회부장은 문화사회부 주임과 차장을 거쳐 부장에 임명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 원불교 문화에 대한 정의를 고민해온 이다. 그런 그에게서 원불교 문화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 ‘열린 마음’으로 귀결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정 교과서에 원불교를 수록하는 일을 시작으로 각종 문화행사, 대정부 활동과 종교연합 활동, 유물 사적, 기록관리, 최근 자살예방에 기여한 공로로 수상한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까지 많은 일을 수행해 온 문화사회부. 원기 62년 ‘문화부’가 발족되고
“주먹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잖아요. 움켜쥐고 있으면 그만큼 작아진다고 생각해요.” 이 생각은 20여 년간 사업을 하며 지켜온 지침이자 신념이다. 또한 나의 ‘선(善)’이 지금 복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온다는 진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새벽 4시, 그의 기도서원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다. ‘원불교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김법종 충북교구교의회 의장(서청주교당)이다. 잘 사는 방법 “사업 목표는 물품을 제대로 만들어 쓰는 사람이 하자가 없게끔 하는 거예요. 대종사님 말씀으로 한다면 모범
원기 109년. 서울교화 100년의 해에 서울교구는 어떤 깃발을 꽂고 어떤 메시지를 외치고 있는가. 한덕천 서울교구장은 부임 후 5년간 서울교화 100주년이 ‘원불교 대중화의 변곡점’이 되고자 구성원들과 기획, 논의, 실행을 해왔고, 드디어 100주년의 해를 맞이하였다. 재가·출가가 함께하는 교법동행, 은혜동행, 문화동행으로 교도부터 교당, 지구, 교구에 이르기까지 교법내면화를 근본으로 삼고, 함께 연대하며 문화의 옷을 입고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는 서울교구. 한 교구장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서울을 교법실현의 대중교화 첫 모태지로 삼
배해석 성주읍장(인성, 성주교당)은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소중히 여기는 교도다. 관학협약으로 알게 된 원광대학교와 교무들로 인해 원불교를 알게 되었고, 시타원 교화재단 법회권장분야 수상을 하기까지 그의 교화스토리엔 인연들을 대하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다. 교화든 공무든 적극성과 열정을 가지고 하는 탓에 장관·도지사·대통령 표창까지 수상했다. 그뿐인가. 그의 따뜻한 성품은 3년 연속 ‘직원들이 직접 뽑는 함께 일하고 싶은 간부공무원’에 선정을 가능하게 했다. 읍장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매일 외우며 조직 생활의
사랑의 빨간 밥차 조리·배식·설거지 봉사까지 마치고 나면 어느덧 저녁 8시 40분. 봉공회 사무실 스위치를 끄고 나서야 비로소 부부의 수요일이 마무리된다. 부부에게 ‘수요일은 봉사하는 날’이 된 지도 어언 15년. 하긴 수요일뿐이랴. 상시로 일어나는 재해재난지역봉사에 제일 먼저 연락하는 필수인력이자, ‘믿고 맡기는’ 교도. 또 서울원문화해설단 활동, 봉공회·여성회 월례회, 여의도교당 활동, 김장봉사까지, 이태언, 박인관 부부(여의도교당)의 1년은 봉공으로 가득하다. 특히 이태언 교도는 서울교구 자원봉사축제 2년 연속 대상의 주인공이
대담. 이성심 정리. 조예현 기자 원불교 익산성지 최초의 건물은 1924년(원기 9)에 지어진 본원실(도치원)이다. 불법연구회 첫 사무실이었고, 소태산 대종사가 초기 제자들과 주로 머물던 곳이다. 대종사는 본원실 마루에 앉아 당시 총부 앞마당을 바라보며 어떠한 구상을 하셨을까? 원불교 제4대를 출발하는 원기 109년은 원불교 익산성지 중앙총부 건설 100년이다. 또한 대종사는 1924년 2월 서울에 상경해 서울 교화를 시작했고, 당해 5월 진안 만덕산 만덕암에서 1개월 초선회를 열었다. 8월에는 총부 기지를 익산으로 확정했다. 이에
오늘도 몇 번이나 사은님 앞에 섰던가. 그가 새벽에 집을 나서며 “사은님, 다녀오겠습니다”며 일원상 앞에서 합장한다. 밭에서 돌아와서도 “사은님 덕에 건강하게 잘 다녀왔습니다”며 두 손을 모은다. 짧은 외출에도, 식사 때도 마찬가지다. 이만행 교도의 하루 일과의 마침표는 언제나 “사은님이 도와주셔서 93세에도 건강하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은님 은혜를 언제 다 갚을까요?”라는 기도다. 교당 먼저 “이제 동네사람들도 내가 일요일이면 교당 가는 걸 다 알아요. 그래서 일요일에 일 나오라고도 안하고, 우리 일도 오지 말라고
원기 109년. 원불교는 교단 제4대를 맞이했다. 제도화된 종교의 이름을 갖고 있는 원불교는 이 시대 어떤 옷을 벗어야 하고, 어떠한 새 옷을 입어야 할까?성해영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는 “원불교는 수행에 철저하면서도 현실적 삶을 도외시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깨달음을 현실의 삶과 통합하려고 했던 종교는 찾아보기 힘들죠”라며 원불교가 한국 특유의 종교 문화인 융합과 포용 정신의 계보를 잇는다고 말한다. 교단 제4대를 맞이한 원불교 내 초청이 많아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 우리는 어떤 답을 듣고 싶고 어떤 답을
이도순 교도 “항상 제가 움직일 때는 양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어요.” 교당에 가기 위해 버스를 두세 번 갈아 탈 때도, 봉공활동을 나설 때도 그의 두 손은 언제나 무거웠다. 주민들에게 판매할 봉공회 물품일 때도 있었고, 봉사활동 물품일 때도 있었다. 광명교당 봉공회와 인연을 맺은 지 28년. 올해는 18년 동안 맡았던 봉공회장직을 이임했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봉공활동으로 향한다. 봉공에 어디 마침표가 있던가. 이도순 교도(광명교당)의 이야기다. 28년 봉공활동 “차량이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니다보면 어떤 날은 눈
대담. 이성심 편집인 정리. 조예현 기자 원불교 교단은 창립한도와 관련하여 매대(每代)를 36년으로 하고, 이를 다시 3회(回)로 나누어 교단을 운영하고 있다. 원기 108년(2023)은 제3대 3회를 마감하는 해로 교단 제3대 결산준비위원회는 『결산문집』 발간, 제3대 종합평가, 제3대 결산학술대회로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원불교의 지난 36년(원기 73~108년)은 어떠한 길을 걸어왔을까. 원기 73년에 발간한 교단 제3대 설계종합보고서에 의하면 교단 제3대는 ‘내실을 통한 성숙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첫째, 전통과 창
취재. 김아영 기자 “민화는 인생과 비슷해요. 선을 하나 그렸어요. 그 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아무리 덮으려 해도 덮어지지 않아요. 흔적이 고스란히 남거든요. 지은 업보가 고스란히 남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려나가다 보면 그 선 위에 붉은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달과 해가 뜬다. 올해 나이 76세. 김도선 교도(서광주교당)는 제12회 대한민국전통채색화 공모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민화작가가 되었다. 내년에는 새로 신설될 호남대학 한국채색학과에 진학할 예정이다. 그가 그려나가는 인생 이야기이다. 감사한 삶 “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미국 유학 중에 찾아 뵌 대산 종사로부터 특별한 유시를 받은 오원선(법명 도훈, 강남교당)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앞으로 과학 지식을 연마한 박사들은 넘쳐날 것이니 도덕공부로 도덕박사가 되도록 하라. 실력을 쌓아서 일원세계 건설을 위해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봉사하라.” 당시엔 미국에 원불교 교립학교가 없었지만 성현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평생 교육계에서 봉사하며 살아왔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이하 미주선대) 3대 총장으로 임명되고 미국으로 떠나는 그에게 응원과 더불어 걱정 어린 시선
취재. 김아영 기자 “3년 동안 교무님과 100일기도를 함께 하면서 많은 게 달라졌어요.” 결제식 날, 겨울의 새벽 찬 공기가 하얀 입김으로 올라올 때면, ‘오늘만 하자. 교무님 계실 때까지만 하자’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다못해 교당 시계 초침 소리는 얼마나 큰지. 하지만 어느 때는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입정이 벌써 끝났네 하는 순간도 있었다. 오롯이 교무님과 단둘이 마주앉은 3년. 많은 게 달라졌지만 무엇보다 ‘교무님이 오래오래 공주교당에 계시면 좋겠다. 함께 기도하고 싶다’로 바뀌었다. 그의 서원도 ‘우리 공주교당이 공주
원기 105년 교단 제4대 제1회(원기109~120)를 4년 앞둔 시점, 종래와는 다르게 이른 위원장 임명이었다. 교단 4대를 더 길게 보고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리라. 위원장엔 김도훈 교도(강남교당,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前산업연구원장)가 임명되었고, 교단 역사상 첫 재가위원장이었다. “개인으로선 부족하지만, ‘재가’를 임명하신 본의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피를 수혈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했다고 봤습니다. 그 뜻을 살리는데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을 했죠.”서울대학교 원불교학생회 초대회장을 시작으로 화정교당 교도회
취재. 김아영 기자 어린 시절 가야금 소리에 매료돼 한평생을 가야금 제작에 바쳐온 고수환 악기장. 올해 7월 그는 최고의 자리인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보유자로 인정됐다. 지금까지 국가무형문화재 현악기 악기장 보유자는 1명에 불과해 그가 명맥을 잇게 된 것이다. 공방 한쪽, 지인들이 보낸 축하화분과 축하현수막이 도착했지만 아직 밖에 내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고수환 악기장(평화교당)은 빈 마음으로 돌아와, ‘더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한’ 의두연마 중이다. 최고의 악기장“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되면서 두 가지 마음이었던 거 같아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가족 참여 아내 이성옥 지도자, 아들 공석천 예비교무 등 가족들이 세계잼버리에 참가했다. 폭염과 태풍 등 변수도 많았다. 각각 어떤 역할을 담당했나?(공)제25회 세계잼버리에서 한국대표단 원불교연맹 참가자 대원·지도자 대표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이)한국대표단 원불교연맹 한국대표단 74대의 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석천)세계잼버리 과정활동 프로그램 중 원불교연맹에서 주관하는 라탄(등나무)공예 IST 일원으로 참가했다. 원불교연맹에서는 몇 명의 대원이 참가했나? 이번 잼버리에 원불교연맹 소속 대원 70명,
어떠한 질문에도 ‘기도와 선’이라는 한 가지 답으로 안내하는 달관자 육관응 한국스카우트 원불교연맹장(경남교구 신현교당 주임교무, 거제훈련원장). 부교무 시절부터 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했고, 원불교신문사 근무 시절엔 출가교화단 스카우트 특성단장을 맡으며 원불교연맹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그다. 그런 그가 올해 5대 한국스카우트 원불교연맹장으로 취임, 부안 새만금에서 열린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를 치루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청소년 인성교육에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자연 속에서 인내심과 협동심, 리더십을 기를 수 있는 스
“55년 동안 전통 붓을 만들어왔지만, 오히려 지금이 붓 만드는 게 더 조심스럽고 어려워요. 좋은 붓이 무엇인지, 그 원리를 다 아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 만드는 거지요.” 1969년 광주 남구 백운동에 터를 잡고 전통 붓을 만들어 온지 55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붓제작 기능전승자 99-1호(노동부)로 경지에 오른 필장이지만, 붓을 만지는 손끝은 여전히 세심하고 조심스럽다. 15 년만의 개인전시회를 통해 붓에 담긴 반세기의 삶을 보여줄 문상호(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광주교당) 필장을 만났다. 붓에 담길 삶“이번 전시회는
잠실교당 창립기에 자신의 신혼집을 법당으로 내주었던 새댁은 일흔이 넘은 교도가 되었다. “대종사님은 언제쯤 저에게 쉬라고 해주실까요?”하며 웃어 보이는 정조련 둥근마음상담연구센터장(잠실교당)은 인터뷰 당일도 상담교육 준비로 분주했다.그는 원불교 상담의 역사가 시작된 1986년부터 함께 주춧돌을 놓았다. 대사회봉공활동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상담 기관인 원광아동상담센터가 설립되었고, 은혜의 전화로 상담활동을 시작, 활동가들을 교육했다. 심리학계, 상담학계에서는 최초의 민간상담기관을 원불교에서 설립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지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