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문화는 전 구성원들의 열린 마음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이명아 문화사회부장은 문화사회부 주임과 차장을 거쳐 부장에 임명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 원불교 문화에 대한 정의를 고민해온 이다. 그런 그에게서 원불교 문화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 ‘열린 마음’으로 귀결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정 교과서에 원불교를 수록하는 일을 시작으로 각종 문화행사, 대정부 활동과 종교연합 활동, 유물 사적, 기록관리, 최근 자살예방에 기여한 공로로 수상한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까지 많은 일을 수행해 온 문화사회부. 원기 62년 ‘문화부’가 발족되고
원기 109년. 서울교화 100년의 해에 서울교구는 어떤 깃발을 꽂고 어떤 메시지를 외치고 있는가. 한덕천 서울교구장은 부임 후 5년간 서울교화 100주년이 ‘원불교 대중화의 변곡점’이 되고자 구성원들과 기획, 논의, 실행을 해왔고, 드디어 100주년의 해를 맞이하였다. 재가·출가가 함께하는 교법동행, 은혜동행, 문화동행으로 교도부터 교당, 지구, 교구에 이르기까지 교법내면화를 근본으로 삼고, 함께 연대하며 문화의 옷을 입고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는 서울교구. 한 교구장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서울을 교법실현의 대중교화 첫 모태지로 삼
대담. 이성심 정리. 조예현 기자 원불교 익산성지 최초의 건물은 1924년(원기 9)에 지어진 본원실(도치원)이다. 불법연구회 첫 사무실이었고, 소태산 대종사가 초기 제자들과 주로 머물던 곳이다. 대종사는 본원실 마루에 앉아 당시 총부 앞마당을 바라보며 어떠한 구상을 하셨을까? 원불교 제4대를 출발하는 원기 109년은 원불교 익산성지 중앙총부 건설 100년이다. 또한 대종사는 1924년 2월 서울에 상경해 서울 교화를 시작했고, 당해 5월 진안 만덕산 만덕암에서 1개월 초선회를 열었다. 8월에는 총부 기지를 익산으로 확정했다. 이에
원기 109년. 원불교는 교단 제4대를 맞이했다. 제도화된 종교의 이름을 갖고 있는 원불교는 이 시대 어떤 옷을 벗어야 하고, 어떠한 새 옷을 입어야 할까?성해영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는 “원불교는 수행에 철저하면서도 현실적 삶을 도외시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깨달음을 현실의 삶과 통합하려고 했던 종교는 찾아보기 힘들죠”라며 원불교가 한국 특유의 종교 문화인 융합과 포용 정신의 계보를 잇는다고 말한다. 교단 제4대를 맞이한 원불교 내 초청이 많아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 우리는 어떤 답을 듣고 싶고 어떤 답을
대담. 이성심 편집인 정리. 조예현 기자 원불교 교단은 창립한도와 관련하여 매대(每代)를 36년으로 하고, 이를 다시 3회(回)로 나누어 교단을 운영하고 있다. 원기 108년(2023)은 제3대 3회를 마감하는 해로 교단 제3대 결산준비위원회는 『결산문집』 발간, 제3대 종합평가, 제3대 결산학술대회로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원불교의 지난 36년(원기 73~108년)은 어떠한 길을 걸어왔을까. 원기 73년에 발간한 교단 제3대 설계종합보고서에 의하면 교단 제3대는 ‘내실을 통한 성숙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첫째, 전통과 창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미국 유학 중에 찾아 뵌 대산 종사로부터 특별한 유시를 받은 오원선(법명 도훈, 강남교당)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앞으로 과학 지식을 연마한 박사들은 넘쳐날 것이니 도덕공부로 도덕박사가 되도록 하라. 실력을 쌓아서 일원세계 건설을 위해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봉사하라.” 당시엔 미국에 원불교 교립학교가 없었지만 성현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평생 교육계에서 봉사하며 살아왔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이하 미주선대) 3대 총장으로 임명되고 미국으로 떠나는 그에게 응원과 더불어 걱정 어린 시선
원기 105년 교단 제4대 제1회(원기109~120)를 4년 앞둔 시점, 종래와는 다르게 이른 위원장 임명이었다. 교단 4대를 더 길게 보고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리라. 위원장엔 김도훈 교도(강남교당,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前산업연구원장)가 임명되었고, 교단 역사상 첫 재가위원장이었다. “개인으로선 부족하지만, ‘재가’를 임명하신 본의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피를 수혈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했다고 봤습니다. 그 뜻을 살리는데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을 했죠.”서울대학교 원불교학생회 초대회장을 시작으로 화정교당 교도회
어떠한 질문에도 ‘기도와 선’이라는 한 가지 답으로 안내하는 달관자 육관응 한국스카우트 원불교연맹장(경남교구 신현교당 주임교무, 거제훈련원장). 부교무 시절부터 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했고, 원불교신문사 근무 시절엔 출가교화단 스카우트 특성단장을 맡으며 원불교연맹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그다. 그런 그가 올해 5대 한국스카우트 원불교연맹장으로 취임, 부안 새만금에서 열린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를 치루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청소년 인성교육에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자연 속에서 인내심과 협동심, 리더십을 기를 수 있는 스
잠실교당 창립기에 자신의 신혼집을 법당으로 내주었던 새댁은 일흔이 넘은 교도가 되었다. “대종사님은 언제쯤 저에게 쉬라고 해주실까요?”하며 웃어 보이는 정조련 둥근마음상담연구센터장(잠실교당)은 인터뷰 당일도 상담교육 준비로 분주했다.그는 원불교 상담의 역사가 시작된 1986년부터 함께 주춧돌을 놓았다. 대사회봉공활동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상담 기관인 원광아동상담센터가 설립되었고, 은혜의 전화로 상담활동을 시작, 활동가들을 교육했다. 심리학계, 상담학계에서는 최초의 민간상담기관을 원불교에서 설립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지난 2
“중국천지를 누가 흔들 줄 아느냐”고 하셨다는 대종사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중국 개척교화에 서원을 세운지 어느덧 30년을 맞이한 김길선 중국교구장.자유롭지 않은 교화환경으로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며 교화비, 생활비를 마련해야했던 세월도 있었다. 교당간판을 걸 수 없어 ‘원광상사 창립’이라는 플랜카드를 걸고 대각개교절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인연이 귀한 해외에서 끊임없이 인재를 찾아 불공했고, 중국교구를 거쳐 간 역대교무들의 30년간의 노고로 11개 교당이 설립됐다. 또한 대지진, 코로나19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종교가 해
최영도 교무(오스틴교당)는 출가를 하며 ‘개척교화’에 대한 서원을 키워갔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지 25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이라는 지역에 ‘원불교’의 깃발을 꽂은 지 11년이 흘렀다. 재작년 오스틴교당은 교단 최초로 메타버스 봉불식을 거행하며 물질개벽 시대를 잘 활용했고, 휴스턴교당과 ‘비전 텍사스 교화’ 시스템을 구축해 공동교화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고정된 생각을 탈피하고, 매사 긍정적인 시각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그. 그 마인드로 고단한 개척교화 현장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있다. 한국에 잠시
취재. 조예현 기자 “교당에 오는 아이들을 내 자녀, 손주처럼 사랑해 주세요. 교당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자존감도 높아지고, 교당을 좋아하게 됩니다.”교화훈련부 청소년국 윤대기 국장은 “그저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며 해맑게 웃는다. 예비교무시절부터 학교 밖 위기청소년들에게 늘 마음이 갔던 그는 교단 안과 밖의 대안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잘하고 있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나름 분석하며 청소년들에게 맞는 원불교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연마하기도 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청소년 교화’ 프로그램과 교구, 교재의 아이
경주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원불교 문화교화도량 새등이문화원. 도예가 무초 최차란 선생은 자신이 운영하던 ‘새등이요(대지2347평, 건물11동)’를 이성택 교무(당시 부산교구장)와의 인연으로 원불교에 희사했다. 전통 도자기 재현과 무초의 다도예법을 원불교에서 이어받기를 원한 것이다. 신기한 인연으로 그곳에 발령받은 최현천 교무(원불교새등이문화원장)는 무초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그의 유업과 원불교 문화 교화를 위해 23년째 봉직 중이다. ● 새등이문화원과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출가를 해서 늘 마음 속엔 스승을 만나 한통 하고
취재. 조예현 기자역사적, 정치적 이슈에 따라 가까운 나라가 되기도 하고, 한 없이 먼 나라가 되기도 하는 일본. 김법조 일본교구장은 교역생활 중 24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본 개척교화를 하며, 교법의 씨앗을 뿌려왔다. 그러나 무엇이든 조심스러움이 많은 일본인들과 대부분 생업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에게 원불교 교법으로 다가가는 교화란 참으로 길고 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제 일본교화의 큰 전환점이 될 동경교당이 새로운 곳에서 봉불식(3월 19일)을 거행한다. 큰 불사에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늘
최대석(본명 성규, ㈜ILT대표, 창필재단 이사장, 성남교당) 원불교문화사업회장은 심미안을 가진 경영인이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에는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일산에 위치한 종합쇼핑몰 ‘벨라시타’는 이탈리아 베로나를 모티브로 해 방문객들에게 여느 쇼핑몰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영감을 준다.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이루어집니다. 그러려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하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불교 문화사업회장을 맡으며 ‘영성(靈性)’을 강조하는 건 이 때문이다. 히말라야, 몽골, 미얀마, 인도 등에서 직접
원불교 최초의 교육기관인 ‘유일학림’을 모체로 탄생한 원광대학교. 의학 전 계열과 로스쿨까지 갖춘 종합대학으로 성장하기까지 지난 76년의 세월은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역사였다. 하지만 최근 인구 감소, 수도권 집중화 현상, 지방 중소도시의 소멸 위기 등의 외부적 어려움으로 지역대학의 어려움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근본적 사명을 갖고 지난해 11월 18일 원광대학교 제14대 총장으로 박성태 교수(김제교당, 경영대학)가 선임되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친손(박광진의 차남)이라는 태생적 인연은 지난 37
아무도 원불교의 ‘기록·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알지 못하던 때부터 창고에 홀로 앉아 방치되어 있던 기록들을 정리하던 사람이 있다. 고대진 교무(원불교기록관리소)는 문화사회부에 근무하던 시절, 도서자료실에 있던 자료들을 정리해서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불복했다. “당시 이곳엔, 먼지투성이가 된 불법연구회 자료들이 쌓여 있고, 이공주 종사께서 문화사회부에 이관했던 100여 박스의 자료도 파묻혀 있었죠. 자료들은 누가 빼갔는지 파헤쳐져 있고요.” 참담한 심정이었다. 왜 이 중요한 기록들을 관리하지 않는가? 기록을 관리하지 않으
신심 깊은 어머니의 인연으로 대학생 때 처음 원불교를 접한 그는 ‘불교면 불교지 왠 원불교? 우리 집이 이제 큰일 났구나’ 싶었단다. 그러나 어머니가 건네 준 에 ‘개교의 동기’와 ‘교법의 총설’을 보고 그야말로 ‘첫눈에 반해’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 했다.당시 교회를 다녔던 그가 보기에 ‘일원상의 진리’는 ‘하느님’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을 읽다가 “어머니, 이왕 다니실 것 열심히 다녀보세요”라고 응원했다며 원불교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그 후 3년 뒤 결혼을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교화현장에서 잘 산다는 이야기 들을 때가 제일 기쁘죠.” 인터뷰 중 김복인 교무(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의 눈시울이 유일하게 붉어지던 순간이다. 출가 후 43년간 미국 교화의 초창기부터 해외 유일한 원불교 예비성직자 교육기관인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이하 미주선대)의 설립 20주년을 지나오면서 겪어온 다사다난했던 일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이야기 해오던 그. 하지만 학생들 이야기에 벅차오르는 뭉클함은 어쩔 수 없다. 미주선대는 원기 86년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교화할 수 있는 원불교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조인국 원불교정책연구소장“음양의 이치로 보면 음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조인국 원불교정책연구소장은 정책연구소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교단의 주요 과제를 연구, 개발하여 이를 교단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고, 밖으로 실천과 활동이 나타나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기 94년에 개소한 정책연구소는 교단의 성장과 발전, 미래를 위한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요구에 의해 탄생했다. 지난 14년 동안 총 88종의 보고서, 자료집, 강의자료, 논문 등을 발간하며 다양한 연구를 축적했고, 교단의 역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