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고 특별한 인연

글. 서용선

‘법신불 사은이시여, 오늘 하루도 상생의 선연으로 살게 하소서!’
흔히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인연 복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선하든 악하든 수많은 인연으로 연결되어있다. 슬픔, 기쁨, 때론 고통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은 정직하게 자기를 닦은 만큼 그 인연이 따라오며 철저한 인과보응의 법칙을 따른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인연을 티끌만큼도 가벼이 넘기지 말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2007년 즈음,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안성에 살던 나는 예산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집을 구하러 다니던 중 아담하고 깨끗한, 가격까지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다.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가 들렸다. 그 집에서 불이 나서 엄마와 딸, 아기까지 셋이 죽었다는 것이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고,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출 줄을 몰랐다. 다행히 원래 주인이 계약금을 돌려주어 그 집이 바라다보이는 옆 동으로 급히 이사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밤이고 낮이고 무서움에 잠을 잘 수도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교무님께 상담하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49재를 올리자고 하셨다. 그렇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들과 인연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누구에겐가 속삭이듯 “제가 49재를 지내드릴 테니 청정 일념에 주하소서.” 하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놀랍게도 그 무서움이 ‘쏴악’ 사라졌다.
49재 날, 그분들을 위해 고사(告辭:천도를 축원하는 글)를 썼다. 나는 진정이 되지 않을 만큼 많은 눈물을 쏟았다. 혹여 이것이 그들의 마음과 슬픔은 아니었을까? 재를 지내고 나니, 어려서부터 늘 불안하고 초조했던 나의 마음도 차차 안정되고 평화롭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이한 인연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전 세계인구 약 77억 명 중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지중하고 지중한 인연인가. 그중 가장 소중한 인연은 만중생을 구원할 소태산 대종사님과의 인연이다.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세세생생 무량중생이 소태산 대종사님의 법문으로 대정진 대적공 만능 만지 만덕으로 모두가 여래위에 오르기를 발원하며 108배를 올립니다.’

문학소녀, 시인이 되다

글. 임도화

저는 1938년생, 8학년하고도 3반입니다.
주위 친구들은 저에게 “너는 지금 제2의 전성기를 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부터 문학소녀였고 항시 문학을 꿈꾸어 왔지만 생활 전선에서 가정을 지키느라 공부를 못하고 틈틈이 습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회갑 무렵에야 저에게 문학의 꿈을 심어 주셨던 초등학교 은사 선생님을 만나서 첫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정규교육은 못 받고 시민대학과 평생교육원, 아카데미 등을 다니며 이천오년에 시로 정식 등단하고 이천칠년에 시조로 일급지에 등단했습니다.
시집도 여섯 권이나 냈습니다. 시단과 시조 단에서 활동하면서 아직도 뭔가 성에 차지를 않았습니다. 끝없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희 딸들이 그걸 알고서 “엄마가 하고 싶은 것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겠느냐.”며 중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에 등록을 해 주었습니다. 이게 리포트를 쓰거나 하는 학문 과정은 아니고 그냥 작품으로 합평하는 실전과정입니다.
오십대가 중간이고 이삼십 대부터, 나이는 두 세대 차이도 납니다. 일주일에 여섯 강좌인데 사십대 강사님이 두 분이나 계십니다. 주간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으러 학생 식당에 몰려갑니다. 식당 밖 컴퓨터로 식권을 사는데 저는 늘 왕언니라서 식권을 많이 사서 돌립니다. 그러면 다시 개인별로 돌아옵니다.
자기들도 나이 들어 저처럼 살고 싶대요. 왕 언니 최고래요. 교수님도 제 이름을 제일 많이 부릅니다. 그냥 불러 주어요. 이름을 쓰지 않는 오분 백일장 수업에서는 작품을 읽고 나서 “누굽니까?”를 묻는데 제 이름은 여지없이 불립니다. 재미로 불러요. 다들 웃기려고요. 하하, 항시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젊은이들과 어울리니 저도 젊어져서 늙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사람들이 제게 젊은 비결을 물으면 저는 속이 비어 안 늙는다고 합니다.   
제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금 주러시아한국문화원장으로 있는 셋째 딸(위묘전)이 원남교당으로 이끌어 주어서입니다. 셋째는 모스크바교당을 지금 십몇 년째 나가고 있는데요, 집도 교당 옆에 입주했습니다. 그쪽은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 가족같이 지내고 있어요. 저도 모스크바에 가면 새벽 좌선부터 나갑니다.
요즘은 분당교당 수산님이 이끄시는 ‘원 시조회’에서 여러 쟁쟁하신 도반님들과 시조 공부를 합니다. 여자로는 총무이신 청진님과 저 밖에 없어서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제가 노년에 이렇게 호사를 누리는 모든 것들이 다 사은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수불보(甘受不報)

글. 이보연

2007년 8월에 아들이 희귀·난치병인 근이영양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마음 아픈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에겐 법신불 사은님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그 믿음으로 비교적 잘 견디고 이겨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없고 힘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 혼자서 아들을 책임지면 다른 두 딸은 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나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2015년, 나에게는 또 한 번 역경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딸이 자퇴를 하겠다고 했다. 집도 싫고, 엄마도 싫고 그래서 자꾸 나가서 살겠단다. 처음에는 너무나 황당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자기한테 뭘 잘못했다고 엄마인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면서 무서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런 딸이 정말이지 너무나 밉고 원망스러웠다. 화가 나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매일 딸과 자퇴는 절대로 안 된다고 싸웠다. 열여덟 살짜리가 집 나가서 뭐 하고 사냐고 싸웠다. 그러나 결국 딸은 자퇴했고,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방을 얻어 나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지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리가 마음에 들어와 “아! 우리 딸이 나의 스승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공부할 때구나. 매일 108배를 시작했다. 108배를 하면서 하고 싶은 말도 다 해보고, 울기도 하고, 딸을 미워도 했다. 일 년쯤 지나 정신이 차려지면서 나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법신불 사은님께 기도하고, 우리가 잘되기를 바랐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부질없는 일인가. ‘참회는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라 하셨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의 기도에는 참회가 없었다.
지난 날 삼독심을 키워오며 살아온 것을 참회 반성하고 법신불전에 꾸준히 108배를 올렸다. 그러고서야 사은님이 나를 지켜 주신다는 걸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딸과 나의 마음이 보이고, 딸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마음이 평온하면서 상생의 마음이 살아났다.
나의 기도정성으로 둘째 딸은 검정고시를 보고, 자격증시험도 보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건강한 모습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딸과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지금은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아들의 병은 진행성이어서 늘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고 내일이면 나빠지지만, 아직은 내 곁에 있으니 행복하다. 어차피 내가 이겨내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감사하게 생각하니 은혜롭다.
원불교 교리로 내 삶의 변화를 맛보고 난 후 아직도 108배는 꾸준히 하고 있다. “지금 여기 깨어 있어 당하는 경계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살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 감사하면서 살게 하소서.” 늘 주문처럼 외우는 나의 기도문이다.

마음에 품은 꿈을 이루다

글. 박샘별

나에게는 오래 마음에 품은 꿈이 있었다. ‘30세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낸 저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삼십 초반의 나날이 성과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평소 김소연 작가의 <마음사전>, <한 글자 사전> 등 언어사전류의 에세이에 열광하였고, 미세한 라임(rhyme;운율)을 살려 SNS에 짧은 글을 올리는 걸 좋아하던 나이니만큼, ‘라임사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게 내 원고 <라임사전>을 만들게 된 시초이다.
하지만 단순히 ‘발랄한 말놀이’에 그치지 않았고, 쓰다 보니 내 안의 상처와 아픔을 돌아보며 위로하는 시간으로 승화하여갔다. ‘다독(多讀)이야말로 나의 마음을 다독이는 작업’이었음을, ‘마음은 미음처럼’ 곱게 써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함이 그 예이다. 나의 아픔을 극복한 것처럼 독자들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기도 여러 차례였다. 빛을 ‘비출’테니 상처받은 마음을 ‘표출’하라고, ‘기쁨’이 주는 ‘기품’을 누리라고 강조함이 그것이다. 그렇게 2018년 12월부터 시작된 작업은 이윽고 2019년 1월 마무리가 되었고, 시집 정도의 얇은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막상 원고는 완성했으나 출판을 해보려니 여러 제약이 뒤따라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10월 말, 섬광처럼 기회는 다가왔다. 순천시 도서관운영과 측에서 ‘예비 시민작가’를 발굴한다는 소식이었다. 선정이 되면 디자인비, 인쇄비 등을 포함한 출판비용을 대준다고 했다. 경쟁률이 셀 것 같았지만, 용기를 내 원고를 접수했다. 잘 될 거라는 주위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11월, 시민작가에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후속 절차가 시작되었고, 실무 출판업무를 담당한 심다 출판사와 연락 속에서 표지 시안, 오탈자 검수 등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12월을 보내고 2020년 1월 11일, 출간된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운이 좋게 방송국 전파도 타게 되었다. 순천시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책이다 보니 순천KBS, 여수MBC 등 지역방송국에서도 관심을 가져 주었다. 특히 구성의 독특함과 진솔한 자기표현에 높은 점수를 받아 순천KBS 라디오에는 예비 시민작가 중 나 혼자 출연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12분간 이어진 심도 있는 인터뷰에 진땀이 났지만, 최대한 솔직담백하게 소감과 포부를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동순천교당 김자경 교무님의 칭찬에 마음 깊은 감동을 느꼈다. 교무님께서는 내 책을 꼼꼼히 살펴보신 후 “이게 바로 감각감상이자 심신작용처리건이 아니겠느냐.”며 “마음에 대해 깊이 탐구한 책”이라는 평을 해주셨다. 내 책이 단순한 ‘말놀이’로 비쳐질까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일소되면서 마음이 환해졌다.
이제 내 책 <라임사전>은 유료로 전환되어 시중에 판매될 날을 준비 중이다. 마음이 아픈 분들에게 이 책이 힘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정성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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