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중도를
맞추어야 한다.”

나는 원기 25년(1940)에 총부를 찾아오게 되었다.
당시 총부에는 소태산 대종사님(이하 대종사님)을 비롯해서 여러 선진님들이 계셨는데 내 눈에 비친 여자 선진님들은 그대로 선녀요, 남자 선진님들은 바로 선관이었다. 총부 구내의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한 개, 풀 한 포기까지도 그대로 화신불로 보였다. 마침 대각전에서 교리강연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일상수행의 요법 1조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만은…’을 들어보니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렵 어떤 사람이 나에게 책 한 권을 보라고 주었는데 그게 바로 <육대요령>이었다. 이 책을 읽어가다가 ‘일원상의 진리’ 대목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옳지.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그토록 찾던 불로초 불사약이란 바로 이 일원상의 진리로구나. 이 진리만 깨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크게 기뻤다. 그리고 흥분했다. 즉석에서 출가를 결심했다. (중략)
내가 처음 총부를 찾았을 때 대종사님께서는 법명을 무거울 중자 묵묵할 묵자 중묵(重默)이라 내려 주셨다. “너는 재주가 많고 경솔한 데가 있으니 모든 일에 자중하고 묵묵해야 한다.” 이 법명은 약 2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중도(中道)를 맞추어야 한다.” 하시며 다시 중묵(中默)으로 바꾸어 주셨다.
나는 흙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자수성가로 많은 농토를 장만하였기에 어려서부터 땅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나는 처음 총부에 와서 10여 년간 과수원 일을 했다. 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일은 복숭아밭에서 인부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뽕나무도 기르면서 과수원 일을 했는데, 나는 이때 대종사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내가 인부들 일을 시키는데 요령 있게 잘 관리한다고 칭찬해 주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복숭아를 싸는데 있어서 수십 명의 인부가 동원되는데, 잘못하다가는 해찰하는 사람이 있게 되어 나는 조를 짰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나누어 임무를 맡게 하고는 조장에게 본인은 일을 안 해도 좋으니 사람들을 잘 살피라고 했다. 이렇게 일을 시키니까 일을 잘하는 사람과 잘못하는 사람이 한눈에 드러나게 되었고, 잘못하는 사람은 다음날 나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복숭아를 잘 싸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다. 그러니 일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고 하나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신 대종사님께서 “인부들을 부릴 줄 안다.”고 하시며 처음으로 다독거려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세월이 가는 줄 모르게 총부생활에 재미를 느꼈고, 더구나 대종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법문을 받드는 그 법열 속에서 나는 선택에 다시 한번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총부에서 내가 했던 일들은 농사일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현실적으로 누가 알아주고 보상해 주지 않아도 진리의 평가가 정당하게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때로 똥통의 밑바닥을 맨손으로 씻으면서도 아무런 불만 없이 일했다. ‘대종사님께서 나에게 무시선 공부를 가르쳐주시는구나. 내 품삯은 진리가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일하고 수도하는 속에서 유무념을 표준하며 공부했다. 땀 흘려 일하는 일꾼에게 진리의 큰 상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로 산업부 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화해교당에서 고구마를 얻어 오게 되었다. 이것을 온상에 심으려는데 고르다 보니 그중에는 약간 썩은 것이 있어 하나를 깎아 먹었다. 이때 마침 대종사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보시고 그날 대중집회 때 불호령이 계셨다. “오랜만에 고구마를 얻어 왔는데 인(人)쥐가 먹더라. 그것도 크고 좋은 것을 골라서 먹더라. 중묵이 저놈이 바로 인쥐노릇 하고 있더라.”
대종사님께서는 어느 일 어느 경계를 물론하고 무심히 넘기시는 일이 없으셨다. 정금미옥으로 다듬기 위해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도 추상같은 불호령을 하시며 행여 중생의 습관이 두터워질까 염려하셨던 것이다. (중략)
세상사는 뜻과 같이 되어주지마는 않았다. 천년 만년 모시고 받들며 살아갈 줄 알았던 대종사님께서 뜻밖에 열반을 하시게 되었다. 원기 28년 6월 1일, 그날도 나는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싸고 있다가 열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날 인부는 약 1백여 명으로 상당히 많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비통함 속에 장례절차는 진행되었고, 일인(日人)들의 감시 하에 발인식이 끝나고 장지를 향해 떠났지만 그나마 나는 장지에도 가지 못했다. 특별히 지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총부를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추석이나 명절 때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럴 때는 주인은 집을 지키고 머슴놈이나 집을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혼인하는 날 제일 시커먼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느냐? 장모가 제일 시커먼 사람이다.”
이런 저런 말씀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북받치는 슬픔을 억누르고 총부에 남아 있었다.

양산 김중묵 종사는 …
● 1920년 6월 22일 전북 김제 출생
● 원기 26년(1941) 4월 26일 출가
● 익산보화원 / 화해·익산·남원교당 교무 /
   교정원 교화부장·총무부장 / 총부 순교감 역임
● 정식 출가위
● 법랍 48년
● 원기 73년(1988) 종사 서훈
● 원기 83년(1998) 5월 4일 열반

양산 김중묵 종사는 원기 5년(1920) 6월에 전북 김제군 부량면 신두리 선인동에서 부친 김정덕 선생과 모친 연타원 박공이화 여사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당시 부친은 자수성가한 치산가로 넉넉한 살림이었다.
10세 때 양산 종사에게 사랑을 많이 주던 외할머니의 열반을 당해 ‘세상 사람이란 다 죽고 마는 것인가? 아버지 어머니도 죽고 마침내는 나까지도 죽을 것이 아닌가. 결국 인생이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죽어가는 것이로구나.’ 하는 등의 생사문제와 씨름하면서 유식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람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사찰을 찾아다녔음에도 참 스승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던 어느 날, 채귀원 선생을 만나 익산의 불법연구회를 알게 되었다.
원기 25년 마침내 찾아온 총부에서 양산 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이 계신 이곳이 내 영생의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부모의 반대에도 출가를 하여 총부 산업부와 과수원에서 주로 일을 담당했다.
양산 종사가 유일학림 2기생으로 공부하게 되었을 때, 교육학·천문학에 흥미가 생기면서 인과보응의 진리를 허구처럼 느꼈다. 특히 물질이 근본이라는 생각이 깊어지면서 영혼 부정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정산 종사와의 깊은 문답을 통해 영혼의 문제, 업의 문제, 삼세인과의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삼세인과에 대한 경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양산 종사는 유일학림을 졸업한 후 화해·익산·남원교당 교무와 총부 교화부장·총무부장 등으로 봉직하였으며, 원기 57년부터는 순교감으로 전국 각 교당에 법풍을 크게 일으켰다.
원기 64년에는 마침내 인과설을 집대성하여 <인과의 세계>를 저술, 발간하였으며, 수백 회의 교리훈련과 49재 및 법회 등을 통해 많은 이들이 안심입명을 찾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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