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정남·정녀의 길

●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
    강진영 | 교무·하이원빌리지
●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리!
    전흥진 | 교무·여의도교당
● 또 다른 나의 시절인연
    남근옥 | 교무·영광교당
● 뜻있고 가치있는 삶이 되도록
    정성수 | 교무·운봉상사원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

“시집 안가니?” “노처녀 히스테리야.”
출가 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심심치 않게 듣던 말이다.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재미나게 하자는 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내 주변의 시선들은 혼자 사는 여자를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숙겁의 인연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학부 생활을 시작할 때 “시집 안가니?” 이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었는지.
출가식을 하고 나간 첫 부교무 임지는 유난히도 내 나이 또래 교도들이 많은 교당이었다. 비슷한 연배의 교도들과 친구처럼 언니처럼 재미있게 생활하다 보면 교도들은 가끔 내게 “교무님, 그 나이에 어떻게 결혼을 안하고 출가를 결심하셨어요?” 하는 부러움 섞인 소리를 하곤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순간의 선택으로 혼자 사는 상황에 대한 시선이 이렇게 달라진 것이 재미있었다.
교당에서 이루어진 저녁 행사를 마치고 뒷마무리를 하고 있으면 당시 주임교무님은 ‘우리 짐 대충 싸서 여행가자. 뭐가 걸림이 있니.’하시며 밤새 차로 달려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곤 했다. 간단하게나마 꾸려간 짐을 풀고서 망중한을 즐겼던 부직자 시절이 문득문득 자유로운 인생의 주제로 떠오른다.
부교무 생활을 마치고 정녀 서원식을 올려야 할 시기가 내게도 왔었다. 그 당시 교단적으로 정녀 서원서 제출에 관하여 여러 이견들도 있었지만 40이 넘은 나에게는 망설임 없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드디어 진리 전에 당당하게 혼자 살겠다고 서원하고, 오롯이 전무출신으로 살겠다고 서원을 다지는 순간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님 말씀처럼 자기 몸 하나 편안하기 위하여 독신 생활을 선택하였는지 되돌아보면서, 서원 그대로 굳은 마음과 고결한 지조(志操)로 이 사바세계를 정화시키고 일체 중생의 혜복 길을 열어 줄 것을 다짐하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녀 서원식을 올리던 그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과 감사함으로 행복한 시기였다.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넘어서 어느덧 나도 50대 중반에 들어섰다. 지금은 도반들과 마음을 연하고 홀로함에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새록새록 더해간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회상에 뿌리내린 서원이 더 단단하게 뿌리내려짐을 느낀다.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시고, 원불교와 자식들만을 중히 여기고 평생 살아오신 어머님은 교화현장에 있던 내게 항상 주문처럼 말씀하셨다. “교도를 대할 때 차별하지 말고 따뜻하고 다정스럽게 대하라.” 어머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라보면서 나도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넓게 키워나가면 그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겠구나.’ 하는 교훈을 늘 마음에 새겼다. 어머니가 자식들인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던 그 충만한 사랑을 기억하며 전무출신으로서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을 표준 삼아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자 연습해 보는 일상을 산다. 
현재 나의 교단적 위치는 후진에서 선진으로 넘어가는 경계인 듯하다. 이제 막 출가식을 올리고 새로이 교화 현장에 나온 교무들을 보면 단지 내가 먼저 출가했다는 출가 선배뿐만 아니라 내 나이가 이미 그들의 부모 나이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으로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지켜봐 주고 이끌어 주며 함께 이곳, 소태산 대종사님 문하에서 신나게 멋지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대산 종사님께서 ‘정남·정녀의 규정을 두는 것은 성불제중을 더 잘 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셨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것은 함께 손잡고 가는 도반들이 있고, 묵묵히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봐주시는 스승님들이 계시고,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소태산 대종사님 성령께서 호념해 주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가 굳건하게 서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스승님들과 도반들, 그리고 가족들의 소중한 기도와 보호가 있음을 알고 있다.
전무출신으로서의 나, 정녀로서의 나,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님의 심통제자로서 나는 온 정신, 온 몸, 온 명예를 이 공부 이 사업에 오롯이 바치는 전무출신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한다. 지극한 신심을 내면 위력을 얻고 제도 받게 된다는 종법사님 말씀이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순간의 표준이고, 은혜다. 산책길을 걷다 보니 엄마는 아기 손을 아빠는 유모차를 끌고 앞에서 걷고 있다. ‘이쁘다, 참 장하다.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옆으로 힘차게 걸어가는 나에게 외치고 싶다.
‘인생 지금부터 시작이야. 멋지게 참 자유, 대 자유를 즐겨볼까.’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리!

‘맹구우목(盲龜遇木) 섬개투침(纖芥投鍼)’
“과거의 윤회하던 업을 미루어 생각할진대 그 몇 천겁을 흑암 지옥에 떨어지고 무간 지옥에 들어가 가지 가지의 고통을 받은지를 알지 못하겠으며 또한 그 얼마나 불도(佛道)를 구하고자 하되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고 긴 겁을 윤회에 빠져 어둡고 어두워 깨지 못하여 모든 악업을 지었는지 알지 못하겠도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부지 불각에 한숨이 나오나니 어찌 가히 방심을 하여 두 번이나 전일의 재앙을 받으리오. 또한 누가 다시 나로 하여금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참을 닦는 길에 매하지 않게 하였는지 진실로 눈 먼 거북이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에 바늘을 던짐이라 그 경사롭고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하리오.”
학부 시절 <수심결>의 위 말씀을 접하고 크게 다행함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는 윤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는 윤회해탈(輪解脫)에 대한 서원이었고, 이생에 일원(一圓)의 위력(威力)을 얻고 일원의 체성(體性)에 합하고자 하는 서원이었으며,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서원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출가를 할 때 결혼은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했었다. 차마 결혼까지 안하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었다. 수학 시절 한 번씩 집에 가면 전무출신의 생활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전무출신은 결혼해도 일반 가장처럼 돈을 벌어 오지도 못하고, 집에 자주 오지도 못하고, 자녀 양육을 책임질 수도 없다고…. 이런 얘기들을 조금씩 전해 들으신 부모님께 걱정이 생겼다. 자녀를 결혼시키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하셨던 부모님 입장에서 출가한 자식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도 걱정이고, 결혼을 해도 가정이 보통 가정 같지 않으니 걱정이 되신 것이다.
출가식을 하고 첫 발령을 받았다.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느 스승님께 문답을 드리니 교단 초창기 선진님들께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심고를 모신 후 찌 뽑기를 하셨다고 하신다. 그 말씀을 듣고 100일 심고를 모셨는데 그 심고가 끝나니 설 명절이다.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이제 찌 뽑기를 통해서 결혼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하니 모두 어이가 없어 하신다. 그 중요한 결정을 찌 뽑기를 통해서 결정하냐고…. 그래서 부모님께 다음 날까지 결정을 해주시면 따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다음 날,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고생시키지 말고 혼자 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정남 지원서를 제출했다.
사실 정남을 하게 된 피상적인 과정은 이와 같지만 실질적 이유는 내 내면의 강한 서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생에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는 서원이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서원이 있다 보니 자연히 신앙과 수행을 진행시키는 훈련 체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대종경선외록> 구사고행장 6절에서 “내 법대로만 하면 예전에 상근기가 100년 걸려서 할 공부라도 나에게 와서 1, 2년만 닦으면 그 공효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셨다. ‘내 법대로’ 할 때 그렇게 된다는 말씀인데, 소태산 대종사님 법대로 한다는 것은 정기훈련과 상시훈련대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질문명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세상은 더 어지러워지고 있다. 큰 자비와 법력을 갖추어 이러한 세상을 도덕으로 감화시킬 불보살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에 맞는 정기훈련과 교화단을 통한 상시훈련이 시스템적으로 교단에 정착될 때 우리 교단은 명실공히 그러한 불보살을 배출하는 천여래 만보살의 회상이 될 것이다. 출가하여 이러한 관심으로 살아왔으니 미흡하지만 남은 생도 이러한 회상을 이루는 데 일조(一助)하고 싶다.


또 다른 나의 시절인연

그 무렵 뭘 해도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긴 요양 휴무로 보다 뒤처진 느낌을 애써 외면했었다. 규모 있는 근무지마다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 채근했었던 것 같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 인연 관계는 마음과 다르게 엉켜가며 스트레스였다. 선배교무로 따랐던 두 오빠의 잇단 요양 휴무는 아직 힘없는 나를 여실히 만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힘이 되지 못했다. 그해 여름이 뜨거워질 때 아빠가 쓰러지셨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가족의 걱정거리는 늘 나였다. 내가 건강해지면 그 근심거리는 사라지리라 여겨왔었다. 뭔가 열심히 애를 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캄캄한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로 다시 벽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때는 그 모든 게 큰 일이었다. 새벽 천일기도부터 하루에도 몇 번이던 의식과 각종법회 등은 내 안정감과는 별개로, 업무로써 바쁘게 바쁘게만 돌아갔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대로 그 미로에서 못 나올 것 같았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혼자 기도를 따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짬을 내려 궁리 중이었다. 서늘한 가을 내음이 느껴질 때쯤 내 이름 앞으로 공문이 왔다. 정화단 선서식 대상자라며 지원 여부에 따른 문심일정과 기도 기간, 기도문 등이 첨부되어 있었다. 내 기도는 그렇게 정화단 선서식 기도와 함께했다. 그 때 그 시절인연으로 나는 현재 ‘여자 정화단원’이다.
지금이라면, 약한 체력에 예민했던 그때 그 경계들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더 의연하게 적공하는 계기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성급했다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막막한 외로움에서 선서식을 계기로 받았던 격려와 관심이 그 경계들을 지내게 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 이유를 넘어 예비교역자 시절 ‘듬뿍’이던 ‘훈증’을 받을 수 있었고, 법연이란 관계를 어떻게 쌓아가야 할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고, 무엇보다 ‘서원’을 다시 챙기게 해줬다.
선서식을 한지 10년이다. 몇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수녀, 경직된 동정녀보다 세상을 향한 마더로 거듭나야 한다(정확한 표현은 아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선서식 전후와 별다를 게 없이 묻혀 지내던 일상에서 그 글은 나를 다소 부끄럽게 했고, 울림이 있었고, 마음을 더 챙기고 키워가야 하는 것임 가르쳐줬다.
그리고 지금, ‘정남·정녀의 삶.’이 ‘일생을 독신으로 공중사에 헌신한 분들의 공덕을 특별히 대우하라.’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본의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본다. 정남·정녀라서 받는 대우가 아니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울림을 울리고, 본의를 챙기며, 서원을 키워가는 ‘또 다른 나의 시절인연’이기를 바라본다. 앞으로 이 길을 희망하는 거룩한 오롯함이 다양한 선택에서 ‘충분한 가치’로 빛나 가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아직 은연중에 ‘우리끼리의 힘’인 것 같은 모습은 옅어지면 좋겠다. 세상과 또 다르게 자리하고 있는 우리들만의 한국적 정서와 문화도 달라지면 좋겠다. 때론 무용담처럼, 때론 드라마나 영화처럼 재·색·명리 경계와 연령대별로 몸 공부, 마음공부를 했던 진솔하고, 속 깊은 공부담을 격의 없이 쏟아내고, 선지자(先智者)와 선병자의(先病者醫)의 문답감정이 명랑하고 유쾌하게 오고가는 풍성한 야단법석, 축제의 장(場)을 꿈꿔 본다. 그렇게 심사(心師), 심우(心友)간 울고 웃으며 윤기를 건네고, 돈독해지는 우리들의 축제가 머지않아 열리리라 꿈꿔 본다. 출·재가, 남·녀, 우리 모두가 성숙해져야 하는 부분도 있고, 시간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이런 바람들로 꾸는 꿈이 늘어간다.
이 가을, ‘전무출신 교역자로서의 서원과 여자 정화단원으로서의 삶이 더 큰 가치로 키워질까’가 화두가 되어 내게 찾아왔다.


뜻있고 가치있는 삶이 되도록

어느 날 형이 원불교 교무님이 되겠다고 했다.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형이 생각지도 못했던 출가의 길을 걷겠다고 하니 충격이었다.
그러던 중 부모님께서도 나에게 출가를 적극 권하셨다. 군인이 되어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 그보다 더 큰 길이 출가의 길이란 말씀을 해 주셨다. 삶의 방향이 바뀌며 서원이 생기게 되는 계기였다.
그렇게 서원을 키워서 출가를 결심하고 총부에서 간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형의 인연으로 당시 교정원장이셨던 항산 김인철 종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정남으로 교단에 봉직하셨던 항산님께 어느 날 “왜 정남을 하셨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남을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짧은 생각에 자유스럽게 생활하시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정남을 하면 어떨까?’란 막연한 생각을 해 보았다.
출가식을 하고 제주교구, 과천교당을 거쳐 법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근무한 지 1년쯤 되었을까, 종법사님께서 결혼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너는 건강이 안 좋으니 결혼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때는 결혼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어서 “아직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결혼이든지 정남이든지 어느 한쪽을 결정하라고 하신다. 확실히 결정을 해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 공부 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받들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스스로를 더 다듬고 싶은 마음도 강했기 때문에 결혼하라는 주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남의 삶을 살겠다는 결정을 했다. 남녀욕도 많고 여러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만 ‘이생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부모님께 정남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께서는 결혼을 해야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지 않겠냐며 반대를 하셨지만 나는 뜻을 꺾지 않고 끝까지 설득을 했다.
정남·정녀 서원식은 제2의 출가식을 하는 듯한 설렘이 있었다. 다시 마음을 챙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생 교단을 위해 온통 바치며 사셨던 스승님들과 같은 정신으로 살고자 정남의 길을 선택했으니 오롯한 마음으로 스승님을 모시는 불제자가 되자고 다짐하며 서원식에 임했다.
정남·정녀 서원식 후 한동안 사가에 갈 때마다 가까운 친척들이 며느리나 손주들을 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실 부모님께 ‘그런 즐거움은 드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죄송한 마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께서 교법 공부를 하면서 진급해 나가는 것을 더 낙으로 삼고 계시고, 나 또한 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여 부처되는 것이 참다운 효도가 된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고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경산 상사님을 모신지 11년째이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평생에 기쁜 일 두 가지가 이 나라에 태어나고,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것.”이라 하셨고, “친히 찾아 이끌어 주신 은혜를 더 입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법문을 봉독하면서 나 또한 큰 스승이신 경산 상사님을 모시면서 공부하는 큰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산 종사님께서 소태산 대종사님을 모셨고, 장산 종사님께서 대산 종사님을 모셨던 그 마음을 닮아가고자 한다. 아직은 부족해서 스승님의 큰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고민하고 있다.
익산 총부에서 생활할 때는 여러 동지들과 만나는 시간도 가지며 살다가 총부에 비해 사람이 적은 운봉에 와서 살다 보니 외로움도 느끼고, 남은 시간을 활용하지 못해 헤매는 모습도 종종 발견하면서 자력으로 공부하며 풀 수 있는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가치 있고 생산성 있는 취미생활을 즐기라.”는 상사님의 말씀을 받들어 상사님께서 실행하시는 취미생활을 유심히 보며 세간의 즐거움보다 자력을 키울 수 있고,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고 있다.
또한, 상사님의 법문을 표준 삼아 공부를 한다. 바로 서원정진, 인욕정진, 자성정진에 대한 말씀이다. ‘서원에 항상 초점을 맞추어 공부해 나가는 것, 불필요한 욕망을 절제하고 인욕으로 극복하는 것, 자성을 지키고 회복하는데 정성을 들이는 것.’
이 세 가지의 말씀을 깊게 새기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보다 교단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선택한 정남의 길이 보다 뜻있고 가치있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금의 이 고민을 놓지 않는 전무출신이 되고자 다짐해본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