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의 소중함
글. 한정인

평소 음식은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에도 감사함을 크게 느끼지 못하며 지내던 때가 많았다. 가리는 것이 크게 없다 보니 20일 간의 여행을 혼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먹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이 없었다. 말이 안 통한다거나, 길을 잃을 수 있다거나, 여자 혼자 밤길을 다녀야 한다는 거나, 짐을 잃어버리거나, 소매치기 당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다니며 엽서나 광고에서만 보던 장면을 눈앞에서 보며 즐거워하던 여행길이 조금씩 힘겨워졌던 순간은, 밥 먹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체력이 떨어졌을 때였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스트라스부르는, 여행지 가운데 기대를 많이 했던 곳이다. 욕심을 부려서 일정을 짠 덕분에 아침도 못 챙기고 새벽같이 떠나 점심도 기차에서 샐러드만 먹고 움직였다. 짐을 숙소에 내려놓고는 식사를 챙길 시간도 없이 다시 기차를 타고 갔다가 돌아와야 하는 조금 힘겨운 일정이었다.

도시는 잘 찾아갔지만, 햇살이 가득한 좋은 날씨에, 보기만 해도 아기자기했던 예쁜 도시를 만났는데도 좀처럼 즐거운 마음이 들지도, 행복한 느낌도 없어 이상했다. ‘여행을 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좋아하는 카메라도 몇 번 켜보지 못한 채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다.
발걸음도 무겁고 배는 굶주리고…. 그렇게 걷다가 맛있게 보이는 케이크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잘 찾지 않았던 케이크 한 조각과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이 왜 그렇게도 맛나던지…. ‘아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비로소 조금 행복이 돌아옴을 느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더 든든하게 저녁도 사 먹고, 일찍 잠들었던 덕분에 다음날엔 좋은 컨디션으로 다음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여행 초반에 그 경험을 한 이후부터 아무리 급한 일정이라도 든든하게 아침을 챙겼고, 세끼 중 한번은 꼭 맛있는 밥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 여행은 무사히 마쳤고, 지금은 돌아와서 일상을 잘 살고 있다.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참 많다. 하지만 늘 있기에 고마움을 못 느끼기도 한다. 내게 에너지를 주고 잘살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들인데, 이렇게 마음에 와 닿기까지 참 소홀했음을 알게 된다. 지금도 가끔은 감사함을 놓치기도 한다. 하지만 전보다는 더더 맛있는 음식에 감사하며 내 안의 에너지를 느끼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순간 순간에 감사함을 느낄 때, 내가 살아가는 데 수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느낄 때, 삶이 더 소중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본다.


마카롱과 땅콩회항
글. 홍지윤

내가 살고 있는 공릉동은 예전 경춘선이 다니던 기찻길을 보존한 채 산책로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작은 규모의 예쁜 음식점과 카페들이 한둘 생겨나더니 현재는 소위 ‘공트럴파크’라고 불리는 카페 거리가 형성되었다. 젊은 사장님들의 취향이 반영된 톡톡 튀는 인테리어와, 평범한 메뉴에도 작은 아이디어 하나 혹은 분위기 하나를 얹어 특별한 자기만의 색깔을 내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동네 주민으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새로 생긴 맛집과 카페 투어는 주민의 신성한 특권이자 의무임을 자처하며 숲길을 산책하면서 한 곳씩 들러보는 중이다.
한번은 수제 마카롱을 파는 카페에서 친구와 나눠 먹을 요량으로 두 종류의 마카롱을 시켜서 반씩 잘라달라고 주문했다. 그 후 친구와 사진도 찍고 커피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잠시 후 카페 사장님이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로 와서는 “손님, 너무 죄송한데 지금 마카롱을 자르다 보니 모양이 안 예쁘게 잘려져서 새로 다른 거 하나를 더 드렸어요.”라고 얘기를 한다.

잘라 달라고 했으니 모양이 흐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괜찮아요.”라고 하니 “그래도 사진 찍으시는데, 안 예쁘게 나올까봐 죄송해서요.” 하신다.
젊은 사장님의 한발 앞선 센스와 친절함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누었는데, 사장님께서 가끔 생각지도 못한 것들로 컴플레인을 하는 손님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신다. 순간 ‘아차!’ 싶은 마음과 함께 다소 귀찮은 요구도 흔쾌히 들어주며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던 앞선 맛집 투어 사장님들이 떠올랐다. 그 분들께 혹시 나는 잠재적인 불만 고객이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땅콩회항을 필두로 최근 조선일보 사장 손녀로까지 이어지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준 ‘갑질’ 사건들이 문득 떠올랐다. 재벌이나 사회 기득권층의 ‘갑질’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갑질’은 단지 재벌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직원에게, 계약관계에서 ‘갑’이 ‘을’에게….

약간이라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쪽이 그 지위를 이용하여 그렇지 않은 상대방 측에 나의 요구를 따르게끔 만드는 모든 일이 ‘갑질’이라고 한다면, 친절함을 넘어 지나치게 ‘애쓰신다.’라는 느낌마저 들게 했던 카페 거리의 젊은 사장님들은 그런 요구들을 무시하기 어려운 ‘을’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이전에 평범한 우리들도 어디에서든 정중하게 해야 할 부탁을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며 알게 모르게 ‘갑질’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은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떠나 모두가 하나
글. 김지윤

몇 주 전, 오전 10시에 하는 요선회 명상 프로그램에 참석 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었다. 종교는 천주교라 말씀하시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셨다. 그분은, “시민선방이 맞느냐?”며 선을 몇 시간 하는지, 명상을 하는 것인지 물으셨다. 나는 “한 시간 삼십분 정도 명상을 한다.”고 답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요선회에는 교도님이 주로 계시기도 하고, 비교도인들도 오신다. 비교도분들은 종교가 특별히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함께 일원상서원문과 휴휴암좌선문을 독경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새로 오신다는 분은 천주교라 내 스스로 자신 있게 일반적인 명상이라 답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다시 조심스레, “요가로 몸을 푼 후, 명상은 한 시간 삼십분 정도하고 원불교 독경과 법어봉독을 합니다.”라고 답을 드렸다. 전화를 주신 아주머니는 알겠다며 준비할 것은 따로 없냐고 다시 물어보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하지만 한주가 지나도 오시지 않기에, 나는 그분이 종교 때문에 오시지 않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분이 선방에 나오셨다.

명상이 끝난 후 큰 교무님이 요선회 회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시면서 “오늘 새로운 분이 오셨는데, 부교무랑 통화를 하셨다고 하네?”라고 하셨다. 나는 “그분이 천주교라 너무 조심스러웠는데 어떻게 나오셨네요? 사실 천주교라 하시면서 시민선방이냐고 물어보고 명상을 물어보시는데, 제가 독경이랑 법어봉독에서 고민을 하면서 말씀을 드렸었어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교무님은 “같은 요선회 프로그램이어도 연령대나 종교 여부의 상황에 맞게 다시 부연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고, 독경에 대한 뜻도 풀이를 해드리면서 선과 연결시켜 설명하면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라고 하시면서, “오늘 천주교 다니시는 그분이 자연스럽게 함께 명상과 독경을 하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정말 다행이에요! 교무님의 지혜는 대단하신 거 같아요! 순발력!”이라고 말씀드리니, 교무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세월이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야. 우리도 헛공부하는 거 아니다?”라고 하셨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던 갑작스런 상황이었음에도, 그 긴 세월 동안 공부하신 흔적으로 자연스레 대처하신 것이 너무 멋있었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교도와 비교도를 둘로 나누어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도 언젠간 교도님이 아니어도, 다른 종교인에게도, 이것 또한 교화의 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려 줄 때가 있겠지? 오늘, 종교를 떠나 모두가 하나이고 은혜임을 다시 깨달았다.


엉터리 곶감
글. 윤문성

엉터리 같은 곶감을 더는 지인들에게 팔아 재낄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 기쁘지 않았다.
나의 조부는 곶감을 수확해 자식들에게 택배로 보내곤 했다. “이만큼 보냈으니 이만큼 돈을 보내라.” 대화 따윈 필요 없었다. 조부 뜻대로 해야 했다. 자식들은 투덜거리며 지인들에게 저렴하게 팔고는 본인들 돈을 더해 조부에게 돈을 보내곤 했다.

난 사실 조부의 엉터리 곶감이 좋았다.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 부모의 맞벌이를 이유로 상주에 위치한 커다랗고 붉은 기와집에 맡겨졌다. 마을에서 집도 제일 커서 좋았다.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나의 할아버지라는 게 왠지 좋았다.

조부의 방식대로 모든 걸 배웠다. 커다란 집 속 화장실을 놔두고 바깥 변소를 추구하는 모습을 따라 하고 싶었다. 계단에서 구르고, 우물에 빠지고, 벌에 쏘여도 “괘안타, 괘안아.”라는 조부의 한 마디면 울음을 거둬야 할 것만 같았다. 조부가 나의 아빠요, 조모가 나의 엄마였다.
그러다 조모는 불친절하게 나를 떠났다. 그때의 나는 워낙 어렸던 탓일까,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기억이 없다. 만약 의식이 없었다면 기어이 깨워 “간다.”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으련만. 동생도 부모의 손이 아닌 조모의 손을 잡고 우리의 곁을 떠났다. 영원히 눈을 감는 건 주름살에 비례하지 않음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알았다.
조모와 동생이 떠나고, 나는 1999년까지 붉은 기와집 슬하에 자라다, 부모의 손을 잡은 채 그곳을 떠났다. 그간 조부모, 동생과 함께 쌓은 추억들은 오로지 나와 조부만 간직한 채 공유할 수 있는 권리이자, 마음 한구석 든든한 식량이었다.

그러다 강산이 바뀔 법한 세월이 흘러 그 식량은 세월이라는 이유로 부피가 줄어든 채 알맹이만 남아있다. 그 알맹이 속 조부는 지루한 뉴스를 튼 채 잠들었으면서 리모컨을 가로챌 시도를 하면 “아직 할아버지 안 잔다.”며 특출난 오감을 뽐내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혹시 지금 이 영안실에 리모컨을 가져다 놓으면 달라질까.
조부의 영안실에서 내 유년 시절 가장 사랑한 트로이카가 이젠 모두 떠났음을 확인했다. 넷의 추억을 나밖에 모른다. 96년부터 99년 충청도 어느 시골 붉은 기와집에서의 일들을 이젠 나밖에 모른다. 먼 훗날 내가 갔을 때 셋은 우리 집이 어떻게 됐냐며 묻겠지. 그러면 내가, 남은 우리가 잘 지키다 왔노라고 말해주면 되겠지.

“할아버지가 떠나니 곶감도 영 시원찮더라.” “할머니가 떠나니 집안 꼴이 얼마나 엉망이었는데.”라고 말해주면 좋아하겠지. 동생에겐 “네가 떠나니 얼마나 적적했는지 줄 아냐?” 말하며 꼭 혼내줘야지. 먼 훗날 벅찬 말들을 건네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그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훗날 내 뒷마당에 심어놓을 감나무가 큼지막이 커서 수확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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