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민족 언론이 본 원불교

글. 박윤철

<시대일보> 1924년 6월 4일자, 불법연구회 최초 소개
원불교의 전신은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이다. 불법연구회는 1924년 6월 1일 전북 익산의 보광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세상에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불법연구회는 창립 당초부터 일제강점기 3대 민족지로 알려져 있는 <시대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매스미디어로부터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창립총회 광경을 전하고 있는 <불법연구회창건사>에 따르면, 창립총회에는 시대일보사 이리지국장 정한조(鄭翰朝)라는 인물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는데, <시대일보>는 1924년 6월 4일자 4면 7단 기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리 불법연구회 창립’이라는 제목 아래 “전라북도에서는 조선의 불교를 일층 확장키 위하여 서상인, 송상면, 오창건, 이동완(이동안의 오기-필자 주), 문정규 제씨의 발기로 제(諸) 유지가 거(去; 지난-필자 주) 1일 오후 2시에 익산군 이리 보광사에 집회하여 불법연구회를 조직하고 제반 결의가 있었고, 회장 서상인 씨 외 제 평의원을 선거하였다.”고 보도함으로써 새 회상 원불교의 출범을 만천하에 고하고 있다.

<시대일보>에 이어 <동아일보>도 1925년 5월 26일자 3면 4단 기사에서 ‘익산에 수도원, 주경야독으로 불법을 연구해’라는 제목으로 불법연구회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사는 낮에는 농사에 힘쓰고 밤에는 불법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고 보도함과 동시에, 이상적인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진세(塵世)를 초월한 극락의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종교생활을 회원들이 서양에 흔히 있는 구교(가톨릭-필자 주)의 수도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주지(周知)하듯이,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 등 민족지가 새 회상 원불교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동아일보> 1928년 11월 25일자 4면 3단에 보도된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의 이상적 생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가장 처음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하는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새 회상 원불교는 1928년 <동아일보>가 아니라 1924년 창립총회 직후 <시대일보>가 새 회상 원불교를 가장 최초로 소개한 언론임이 확인되고 있다.
 
<동아일보>의 경우도 1928년이 아니라 그보다 3년 앞선 1925년 5월에 이미 새 회상 원불교를 세상에 소개한 이래, 여러 차례 보도했다. <동아일보>의 새 회상 원불교 관계 기사로는
1925년  5월 26일  3면 4단 <익산에 수도원, 주경야독으로 불법을 연구해>
1928년 11월 25일 4면 3단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의 이상적 생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3대강령 하에 움직이는 4백 회원>
1929년  5월 11일  3면 6단 <익산 불법대회>
1935년  5월  9일  3면 1단 <익산 불법회 대강당 신축낙성>
1936년  4월 22일  4면 8단 <무료의원 설치, 익산 불법연구회 계획>
등 총 5건이 확인되었고, 이 가운데 1928년 11월 25일자 기사를 제외하고는 이번에 필자가 처음으로 확인한 기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는 새 회상 원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후일 전무출신으로 출가하여 활동하는 몇 분의 선진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보도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유산 유허일 선진의 경우에
1923년  4월  3일자 2면 <재외동포 위문회원 방명(유상은)>
1927년 10월 27일자 5면 <가갸날 축하기 행렬과 기념음악연주회(유상은)>
1927년 12월 21일자 4면 <한글회 연구회(유상은)>
등 3건의 관련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위의 기사에 나오는 유상은은 바로 유산 유허일 선진의 본명이다. 그리고, 유허일 선진 외에 <동아일보>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선진으로는 선산 변중선 선진과 구타원 이공주 종사가 있다. 선산 선진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는 올해 6월에 간행된 선산 문집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소개를 생략하고 구타원 선진 관련 기사만 소개한다.
1926년  1월  6일 4면 <경성 여자 청년회 집행위원회(이경길)>
1927년  2월 15일 3면 <어머니가 된 감상 제 1회(경성 이경길)>
1927년  2월 16일 3면 <어머니가 된 감상 제 2회(경성 이경길)>
1927년  2월 17일 3면 <어머니가 되 감상 제 3회(경성 이경길)>
1927년  2월 18일 3면 <어머니가 된 감상 제 4회(경성 이경길)>
1927년  5월  1일 5면 <남편 遺志 아이들 양육과 신문 모으기가 재미>
1933년  6월 13일 2면 <창간 이래 본보, 普專 도서관에 문화운동에 도움이 되라고 이경길 여사가 기증>

이야기를 바꾸어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실린 새 회상 원불교에 관한 기사에 대해 소개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매일신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써 식민지조선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일본의 식민정책을 널리 홍보하는 신문이었다. 이른바 권력을 비호하는 어용신문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총독부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도 새 회상 원불교에 주목하여 총 15회에 걸쳐 보도하고 있다. 15회의 기사 가운데 4건은 이미 알려져 있는 기사이고, 11건은 필자가 금번 새로 발굴한 것이다.

새로 발굴된 기사 중에는 “지방인사: 박중빈 씨(불법연구회 종법사) (전북 익산군 신룡리) 회무(會務)를 대(帶)하고 본월 4일부터 10일간 체재 예정으로 상성중(上城中)” (1932년 2월 6일자, 3면 11단)이라는 내용, “익산군 북일면 불법연구회에서는 일반에게 의료의 편의를 도(圖)하고자 금번 이리읍 본정(本町) 1정목에 보화당약방을 개업 확장한 동시에, 8월 1일부터 동 7일까지 1주일간을 극빈환자에게 무료로 약품을 진정(進呈)한다고 한다.”(1936년 8월 1일자, 4면 13단)라는 내용이 눈에 띤다. 앞의 기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상경 소식을 전하는 기사이고, 뒤의 기사는 보화당에서 가난한 환자를 위하여 무료로 약품을 나눠준다는 기사이다.

이상,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등 일제강점기 민족언론은 말할 것 없고, 총독부의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마저도 새 회상 원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으로 지속적인 보도를 계속한 이유에 대해 재일사학자 조경달 교수(일본 치바대학)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식민지조선의 신흥종교 신자의 대부분은 빈민일 뿐만 아니라 비식자(非識者)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불법연구회는 그러한 신흥종교 교단과는 전혀 달랐다. 불법연구회는 도시 지식인사회로부터도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대적(近代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7집, 2016년 3월, 292~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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