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에서 개벽운동가로의 길
- 선산 변중선 선진의 사례 -
글. 박윤철

‘一圓壹家’, 한글로 바꾸면 일원일가. 이 휘호는 독립운동가 출신 선산 변중선(禪山 邊衆船, 1903~1980) 선진이 원불교에 귀의한 뒤 남긴 필적이다. 1971년 4월의 원불교 개교 반백년 기념대회가 마무리된 지 넉 달 뒤인 8월 10일, 원불교 중앙총부 교무부(지금의 교화훈련부) 주최로 열린 기관장훈련 도중에 일언첩(一言帖)에다 써서 남긴 것이다.

선산 선진은 원광대 초대 한의과대학 학장, 원불교 법은사업회 초대 이사장, 중앙요양원 원장, 동화병원(현 익산 원요양병원) 원장 등 지금까지는 주로 원불교 교단의 3대사업 가운데 ‘자선’에 해당하는 의료복지 분야의 초석을 놓은 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백주년을 한 해 앞둔 올해에 중국 상해를 무대로 하여 전개한 선산님의 독립운동 행적을 담은 1차 사료가 대거 발굴됨으로써(<구국과 개벽의 길을 찾다 선산 변중선>, 모시는 사람들, 2018 참조) 독립운동가로서 선산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선산님 열반 당시 “이 분은 독립투사로써 이 나라에 공헌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는 ‘칠보가 보물이 아니라 자기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 귀한 보물이라(七寶非眞寶 解脫是眞寶)’는 자각에서 재색명리를 다 버리고 출가하였으니 그때 이미 항마로 출가하였다. 독립투사로 이 교단에 전무출신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기록하여 전하도록 하라.”는 대산 종법사의 부촉 법문에 따라 선산님의 독립운동 내력을 1차 사료에 의거하여 소개한다.

“서기 1928년 5월 17일기, 재중국 한인청년회, 어신의주형무소 예심판결문(西紀 一九二八年 五月 十七日起 在中國 韓人靑年會 於新義州刑務所 予審判決文).” 이 내용은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28년 5월부터 8월까지 신의주형무소에서 이루어진 예심(予審) 재판 당시, 선산님의 진술이 포함된 재판문서의 표지에 쓰인 것이다. 위 문서에 따르면, 선산님은 19세 때인 1921년에 상해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제대학(同濟大學)에 입학한다. 그러나 독일어로 강의하는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던 선산님은 어학 실력을 닦기 위해 동 대학 부속 중학부에서 수년간 공부 끝에 1927년 6월에 중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그해 9월에 대망의 대학부 의과(醫科)에 입학하여 산부인과를 전공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선산님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1920년대 중국 상해는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수많은 지사(志士)들과 유학생들이 몰려드는 곳이었고, 그 같은 지사들을 하나로 묶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서울의 중동고보 및 휘문고보 재학 시절에 황의돈, 권덕규 등 민족주의자 선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바 있는 선산님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위의 예심판결문에서 밝혀지는 선산님의 행적을 보면, 1924년 봄에 ‘상해한인학생회’에 가입한 뒤 1926년 10월 23일에는 상해 일대의 3개 유학생단체를 통합한 ‘상해한인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 3월에는 ‘일본제국을 박멸하여 피압박민족인 조선인의 해방’을 목표로 내건 ‘상해한인청년회’의 집행위원에 선출된다. 또한, 1927년 11월 8일에는 중국 전체의 한인 유학생 단체를 총괄하는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을 결성하고 그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며, 그해 11월 12일에는 ‘전중국 한인청년 총동맹’ 조직준비 대표를 선발하여 만주로 파견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산님은 1926년부터 활발해진 ‘민족유일당 운동’ 즉,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서로 합력하여 제국주의 일본의 압제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거물급 사회주의 운동가들과도 교류하였다. 선산님의 진술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는 장지락(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한국인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실상을 감동적으로 서술한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산의 본명)을 비롯하여, 조봉암, 여운형, 현정건, 홍남표, 김원식, 구연흠 등등 쟁쟁한 멤버들이다.

다시 예심판결문 속의 진술로 돌아가 선산님의 말씀을 들어본다. “(중국본부 한인) 청년동맹의 목적은 무엇인가. 중국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조선인 청년을 규합하여 그 단결력으로써 조선을 독립시키고자한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이란 무엇인가. (조선을) 일본 통치하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하나의 나라를 창립하는 일입니다. 어떤 필요가 있어서 독립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조선민족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청년동맹을 창립하여 그 중앙집행위원장 직무를 수행한 지도자다운 답변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청년동맹 창립의 최고 목적으로 내걸고, 그 위에 다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나로 통합한 ‘민족유일당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는 선산님의 행적은 제국주의 일본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선산님은 1928년 봄에 마침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26세 때의 일이었다.

체포된 선산님은 배편으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된다. 신의주로 이감된 것은 중국 관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판 관할지역이 신의주였기 때문이다. 예심판결문 진술에 따르면, 선산님은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된 가운데 그 해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에 걸쳐 예심 재판을 거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동아일보> 1928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기사 속에는 예심 재판 후속으로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이루어진 1심 재판 상황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는 바, 12월 21일에 이루어진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 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1월에는 평양의 복심 법원으로 이송되어 다시 6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1929년 6월 10일에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된다. 그리고 만 3년에 걸친 옥중생활을 보낸 뒤, 1932년 6월 10일 석방되기에 이른다. 이때가 선산님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석방된 이후의 선산님의 삶은 어떠했을까? 식민지 조선을 내리누르고 있던 일본 경찰의 감시로부터 과연 자유로웠을까? 그렇지 않다. 고향 근처인 전북 고창에 은둔해 있던 선산님은 다시 한 번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변동화(선산님의 본명) 피체 호송 중에 절각, 도 경찰의 호송 중 이리에서’라는 <동아일보> 1934년 2월 26일자 기사는 오늘날로 치면 ‘정치범이자 사상범’인 선산님이 식민지 일본 경찰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선산님이 두 번째 체포된 1934년은 원기 19년이다. 이 시기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이끄는 불법연구회가 ‘개인구제와 사회공헌’이라는 기치 아래,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자본이 우글거리는 이리(현재 익산) 일우에서 ‘약자가 강자되는 길’을 화두로 내걸고 비정치화된 독립운동, 곧 총칼로 무장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 정신으로 무장한 ‘제 3의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을 때이다. 선산님의 우리 회상과의 인연은 아마도 이때 맺어진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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