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이고,
밤낮으로 바뀌는 일상은 자연의 원리이다 
글. 김정탁

우리가 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命)이고, 하루가 밤낮으로 바뀌는 일상은 자연의 원리이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이런 하늘의 뜻은 어떤 생명체도 거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매일 마주하는 하루도 밤낮으로 늘 바뀌기 마련이다. 이것 역시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원리이다.

죽고 살고, 또 밤낮으로 바뀌는 일상처럼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게 모든 사물의 참 모습이다. 그러니 자연은 우리에 비해 훨씬 위대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이에 우리는 간섭할 수 없고, 또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영역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편안히 따르는 게 현명한 삶의 태도이다. 대종사가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간다.

옛날에 대종사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자는 그를 진인(眞人), 즉 참다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진인은 간섭할 수 없고, 또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침묵하면서 편안히 따르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진인은 자연을 특별히 아버지로 여기면서 몸소 자연을 기꺼이 사랑한다. 진인이 훌륭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니 진인이 아버지라고 여기고 기꺼이 사랑하는 자연에 대해 우리들 또한 자연을 사랑하는 게 마땅하다. 게다가 우리는 군주를 특별히 자기보다 낫다고 여기면서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는 일을 자행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군주보다도 훨씬 진실한 존재인 자연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치는 건 당연하다. 이처럼 자연은 진인이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또 진실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자연은 하고자 함이 없는 무위(無爲)에 따라 행동하므로 훌륭하고 진실한 존재이다. 장자는 이런 사실을 샘이 마른 물에서 물고기가 살아나기 위한 방법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다. 샘에 물이 마르면 물고기는 땅 위에 그대로 노출되는데, 이때 물고기는 서로 침을 뱉거나 서로 거품을 내서 적셔준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물고기의 사랑(仁)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본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서로를 적셔주더라도 물이 마른 샘에 있는 물고기는 죽기 마련이다. 이런 사랑은 결코 값어치 있는 사랑이 아니다. 마치 불쌍한 사람에게 던지는 몇 푼의 동전과 같을 뿐이다. 이들이 처한 불행한 삶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꿔주는 게 큰 사랑이다. 이런 큰 사랑을 베풀려면 샘에 물을 채워줘야 한다. 그래야만 물고기가 주어진 생명을 다할 수 있다.

그래서 물고기를 집어 샘에 놓아주더라도 물고기는 샘물의 고마움을 의식하지 못한다. 샘에 물이 있는 걸 당연하다고 여겨서이다. 이는 물고기가 샘에서 각자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보존할 곳을 찾았을 때 굳이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물고기는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또는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조차 없다. 이런 식으로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잊을 때, 그것이 최고의 사랑이다. 이에 비해 침을 뱉거나 거품을 내서 적셔주는 건 하찮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샘에 물을 채우는 건 누구인가?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비를 내려야만 샘에 물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를 내리는 것과 같은 무위자연에 따른 사랑은 침을 뱉거나 입을 적셔주는 등의 유위부자연한 사랑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요(堯)임금을 성군이라 기리거나 걸(桀)왕을 폭군이라 비난하는 것은 두 사람을 모두 잊고 올바른 도로 동화되는 것만 못하다. 그렇다면 누가 요임금을 성군으로 기리고, 걸왕을 폭군이라 비난하는가? 유가이다. 유가의 이런 태도는, 물고기가 침을 뱉거나 거품을 내서 서로를 적셔주는 걸 사랑이라 여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자는 물고기가 물을 찾아가길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도를 찾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물을 찾아가길 바라는 물고기에겐 땅을 파 못을 만들어주면 되고, 도를 찾아가길 바라는 사람에겐 자연이 비를 내리게 하는 것처럼 자연의 처분만 기다리면 된다. 장자에 따르면 성군과 폭군의 차이는 이런 자연의 처분을 얼마만큼 기다렸는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하찮은 차이일 뿐이다. 이에 비해 물고기가 못에서 서로를 잊듯 사람도 도술(道術) 안에서 서로를 잊는 건 단순한 사랑을 베푸는 것에 비해 큰 차이이다. 이쯤 되어야 큰 사랑인지 작은 사랑인지, 또 성군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리는 게 의미가 있다. 

게다가 자연의 도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이르러선 그 작용이 더욱 두드러져서 설득력이 더해진다. 장자는 태어나면 자연이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수고롭게 하고, 늙게 해 편안하게 하고, 죽게 해 쉬도록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져 죽음도 두렵지 않다. 장자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수만 번 변해서 나타난 건데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한 단계일 뿐으로 여겨서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죽으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런지 모른다. 이것이 만물의 영원한 참 모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의 형체를 받고 태어나선 특별히 기뻐한다. 장자는 이걸 기뻐하면 앞으로 기뻐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단언한다. 성인은 일찍 죽어도 좋고, 오래 살아도 좋고, 태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여긴다. 이건 성인이 삶과 죽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있어서이다. 

자연의 위대함은 이뿐만이 아니다. 장자에 따르면 만물의 커다란 참모습은 자연에 있다. 그걸 어찌 알 수 있는가? 만약 사람들이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연못 속에 감추면 든든히 감추었다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한밤중에 어떤 장사가 그걸 짊어지고 달아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작은 것을 큰 것에 감추면 도둑이 훔쳐 달아날 데가 있다. 반면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도둑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훔쳐 달아날 수가 없다. 성인은 이처럼 천하가 엄청나게 크다는 걸 알기에 사물에 대한 온갖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은 사물이 달아나지 못하는 경지에서 노닐며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둔다.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 하는 멋진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성인을 본받으려 한다. 하물며 만물이 매여 있고, 또 만물의 삶과 죽음이 의존하는 도(道)를 본받아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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