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에겐 형태는 있어도
모습(情)은 없다 
글. 김정탁

<덕충부>는 장자와 혜자(惠子)의 대화로 마무리한다.
혜자는 혜시(惠施)를 높인 표현인데 장자와 둘도 없이 친한 친구이다. 이 때문에 《장자》에서 혜시가 자주 등장하는데 늘 장자의 조롱거리 대상이다. 장자는 혜시의 그릇된 생각과 판단을 꼬집음으로써 장자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장자와 혜시가 직접 대화하면서 충돌하는 장면은 《장자》 전편에 걸쳐 여섯 군데뿐이다. 내편에선 <소요유>와 <덕충부>에서 각 한 번씩, 외편에서 <추수>에서 두 번, 잡편에선 <서무귀>와 <외물>에서 각 한 번씩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소요유>와 <덕충부>에 등장하는 장자와 혜시의 대화 내용이 각 편을 마무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장자와 혜시의 대화 내용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말해준다.

앞서 <소요유> 마지막 장에서 이루어졌던 장자와 혜시의 대화를 한 번 복습해보자. 혜시가 위나라 왕이 준 박씨를 심었더니 크게 자라났는데 크기만 컸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부수었다는 내용과 함께 시작한다. 이에 대해 장자는 정말로 큰 걸 쓸 줄 모른다고 혜시를 조롱하며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쓰임새를 상기시킨다. 혜시의 집 앞에 있는 큰 나무는 유용지용(有用之用)의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무하유(無何有)의 마을이나 사방이 확 트인 광막(廣莫)의 들판에 심어 놓으면 그늘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분명 큰 쓸모를 자랑한다. 장자는 그 큰 나무 밑에서 무위(無爲)의 마음으로 하릴없이 돌아다니거나 유유자적하며 노니는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소요유란 제목에 합당한 결론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소요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자와 혜자의 이 대화 내용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실제 있었던 대화라고 보인다. 마찬가지로 <덕충부>의 마지막 장 대화 내용도 실제 있었던 대화라고 보인다. 그만큼 그 대화 내용도 사실적이다. 게다가 <소요유>에서처럼 <덕충부>에서도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이 대화 내용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따라서 <덕충부>의 마지막 장이 비록 평이한 내용처럼 보이더라도 그 해석을 소홀히 하며 얼렁뚱땅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 이런 입장에서 <덕충부>에서 소개된 주인공들, 즉 왕태, 신도가, 숙산무지, 애태타, 인기지리무신, 옹앙대영이 한결같이 신체적으로 왜 불구인가 하는 점에 대해 또 한 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덕충부>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신체적으로 왜 한결같이 불구일까? 단지 얘기를 재미나게 전개하고 싶어 그런 건 아닌 듯싶다. 그보다는 덕이 뛰어나면 신체가 불구일지라도 인간적 훌륭함에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면 <덕충부>의 마지막 장은 <소요유>의 마지막 장처럼 앞에서 얘기한 내용들을 깔끔히 정리하면서 그 마무리를 잘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장자 주석서들은 <덕충부>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앞 내용과의 연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심지어 앞 내용과 관계없는 별개 내용쯤으로 취급해서 해석을 한다. 해석상에 이런 문제가 왜 생겨날까? 필자가 보기엔 마지막 장의 핵심어인 정(情)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은 감정보다는 모습 내지 표정으로 해석해야만 <덕충부> 전체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덕충부> 마지막 장은 사람에게 본디 모습(情)이란 게 없는가라는 혜시의 질문에 대해 장자가 그렇다고 동의하는 대답으로 시작한다. 장자가 볼 때 신체가 불구이든 정상이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마치 원숭이를 보면 팔이 길거나 짧거나 간에 우리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같은 원숭이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발뒤꿈치가 잘린 왕태나 그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온전한 몸의 소유자인 공자는 참 모습에서 볼 때 모두 똑같다. 이것이 <제물론>에서 언급된 바 있는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와 통한다. 즉 크게 보면 모두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이다. 마치 대붕이 하늘 높이 올라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의 사물들이 구분되지 않고 모두 하나로 똑같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런 관점을 또 한 번 뛰어넘어 자연스러움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 장자는 도(道)가 얼굴을 주고, 자연(天)이 몸을 준 것으로도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데 있어 충분한데 따로 모습이 필요하냐고 혜시에게 묻는다. 여기서 얼굴을 주었다는 건 표정은 사람의 소프트웨어를 받은 거고, 몸을 주었다는 건 신체라는 사람의 하드웨어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받았으니 장자로선 더 이상의 모습이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당황한 혜시는 사람이라고 이미 말했는데 어찌 사람의 모습이 없느냐고 다소 궁색한 입장에서 장자를 다그친다. 이에 장자는 그런 모습은 자신이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장자가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우리가 억지로 꾸며낸 모습이 아니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은 장자에게선 애당초 사람의 모습에 속하지 않는다.

장자가 볼 때 억지로 만들어지는 사람의 모습은 두 가지 이유에서 생겨난다. 첫째, 좋다 싫다하는 감정을 만들어 자기 몸을 안으로 다치게 해서이다. 둘째, 늘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따르지 않고 부질없이 생명을 늘려서이다. 먼저 좋다 싫다하는 감정으로 인해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억지로 생겨날까? 그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려탄변집(慮嘆變慹)의 생각, 요일계태(姚佚啓態)의 행동에 의해 생겨나는 모습이다. 이 모습들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우리 몸이 안으로 다쳐, 즉 내상을 입어서 생겨난 모습이다. 즉 성(性)에 의해 정(情)이 나타난 건데, 이때 성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의해 다친 본성이다. 그래서 타고난 본성에 따라 참모습이 나타난 게 아니라 상처 난 본성에 의해 거짓되거나 과장된 모습이 나타난 거다. 

또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억지로 생겨날까? 그것은 숨을 길게 내쉬고 길게 들이쉬는 취구호흡(吹呴呼吸), 기운을 뱉어 내고 새 기운을 받아들이는 토고납신(吐故納新), 곰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리거나 새처럼 목을 길게 빼는 웅경조신(熊經鳥申)과 같은 양생법에 의해 몸을 비비꼬아 만든 모습이다. 이처럼 몸을 비비꼬아 만든 모습은 자연의 참 모습과 동떨어져 있다. 팔백 살까지 산 팽조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다. 이에 반해 좋다 싫다하는 감정으로 인해 생겨난 모습은 논리주의자 혜시가 만들어낸 모습일 거다.

장자가 볼 때 혜시는 정신을 멀리해서 좋다 싫다하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혜시는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기 마련이다. 사실 논쟁이 막상 벌어지면 혜시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기를 쓸데없이 수고롭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같으면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르면 표정이 어그러진다. 사람들은 이런 표정을 가리켜 모습이 있다고 말하지만 장자에게 있어 이런 표정은 참 모습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의 참 모습은 ‘모습이 없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 없는 모습은 논쟁을 벌이다가 나무에 기대어 읊조리면서 책상에 의지해서 자는 혜시의 얼굴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그러니 혜시의 참 모습은 논쟁을 벌일 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지쳐 스러져 잘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혜시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견백(堅白)의 궤변, 전국시대 조나라 공손룡(公孫龍)의 궤변, ‘굳고(堅) 흰(白) 돌은 굳은 돌과 흰 돌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눈으론 흰 걸 알고, 만져야 굳은 걸 알기에 굳은 돌은 굳을 뿐 흰 돌이 아니란’ 궤변1)을 갖고 떠들면서 억지로 모습을 만들고 있으니 친구 장자 입장에선 딱할 뿐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