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박함, 소박함, 질박함이 살아있는 과거가 오히려 아름답다!
글. 김정탁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개교 표어이다.
 그런데 이 표어는 역사가 발전한다는 걸 전제로 등장한 말일까? 아마도 정신을 개벽하면 역사는 발전하지만 정신을 개벽하지 못하면 역사는 발전할 수 없다는 입장일 것이다. 서양 역사관은 이와 다르다.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진보의 역사관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역사관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이란 개념에서 잘 나타난다. 이 개념에 따르면 과거는 덜 문명화되고, 현재는 문명화되고, 미래는 더 문명화된다는 입장이다. 이런 역사관이 과연 타당한 걸까?

 시빌라이제이션을 대체할 마땅한 우리말은 없다. 흔히 문명이라고 번역하지만 뉘앙스에선 그 차이가 크다. 시빌라이제이션은  ‘시빌라이즈’ 해야 한다는 가치지향적 성격을 지니지만 문명이란 개념에선 이런 가치지향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말 그대로 문자(文)에 의해 밝아진다(明)는 의미이기에 역사 전개를 몰가치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표현에 해당할 뿐이다. 또 우리의 머릿속 생각이 밝아지는 데 문자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문명이란 개념은 시빌라이제이션에 비해 훨씬 큰 타당성을 지닌다.

 동아시아 고대사상의 공통된 특징은 서양의 시빌라이제이션 역사관과 달리, 과거를 긍정적으로 파악해 과거를 오히려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공자만 해도 주(周)나라 예법을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도가는 주나라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삼황오제 중 하나인 황제(黃帝)의 시기를 이상으로 삼았다. 장자는 아예 거슬러 올라갈수록 바람직한 시대라고 보았다. 시간을 거스를수록 세상이 타고난 본성(性)과 자연스런 모습(情)을 더 많이 지닌다고 보아서이다.

 이와 관련해 장자는 <제물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옛날 사람 중엔 지혜가 지극했던 사람이 있다. 어째서 지혜가 지극하다는 건가? 사물의 존재를 처음부터 의식하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그 지혜가 너무나 지극하고 최고인지라 더 이상 보탤 게 없다. 다음으로 지혜가 지극했던 사람은 사물의 존재만 의식해 사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 지혜가 지극했던 사람은 사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할 뿐 옳음/그름으로 구분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옳음/그름의 구분이 분명해지면 도(道)가 허물어지는 원인이다.”

 시빌라이제이션은 이것/저것, 옮음/그름 구분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원시과학은 이것/저것의 구분에서 그치지만 근대과학은 옳음/그름의 구분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서양 세계관과 장자 세계관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서양 세계관은 구분이 많이 이루어질수록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장자 세계관은 그 반대이다. 특히 옳음/그름의 구분에 있어선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장자는 세상의 구분이 덜 이루어질수록 그 자연스런 모습을 잃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빌라이제이션이든 문명화든 간에 이것들은 세상의 타고난 모습과 자연스런 모습을 잃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장자는 <선성(繕性)>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사람은 혼돈의 상태에 있으면서 온 세상 사람들과 담박한 고요함을 얻었다. 그 당시엔 음양이 조화되어 고요했고, 귀신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사철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만물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온갖 생물들은 천수를 다했고, 사람은 지혜가 있어도 그걸 쓸 데가 없었다. 장자는 이런 시대를 가리켜 타고난 본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이 시대엔 사람들이 하려는 바가 없어도 모든 자연의 변화가 그러하듯 늘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런 덕(德)이 아래로 기울자 수인씨와 복희씨가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본성을 따랐지만 그것은 타고난 본성과 같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덕이 아래로 기울자 신농씨와 황제가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본성에 편안해 했지만, 그건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따른 게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덕이 아래로 기울자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자 요와 순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는 정치의 흐름을 일으켰다. 그러나 순박함(淳), 여유로움(散), 소박함(朴)을 엷게 만들어서 도는 떨어져나갔고, 덕은 얇아졌다.

 그런 후부터 사람들은 타고난 본성을 내던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또 서로의 마음을 몰래 헤아리기에 바빴다. 그 결과 천하를 안정시키는 건 점점 힘들어졌다. 그런 후부터 사물을 설명하는데 꾸미는 언어가 동원되고, 온갖 지식이 더해졌다. 그 결과 꾸미는 언어는 사물의 자연스런 바탕을 없앴고, 온갖 지식은 우리의 본래 마음을 잃도록 했다. 그런 후부터 세상의 혼란이 시작되어 사람들은 타고난 본성과 참 모습으로 되돌아가 처음의 자연스런 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세상은 도를 잃고, 도는 세상을 잃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세상과 도가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잃었으니 도를 터득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일으키고, 세상이 어떻게 도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도가 세상을 일으키지 못하고, 세상이 도를 일으키지 못하면 성인은 산속에 들어가 굳이 숨지 않더라도 덕은 자연히 숨기 마련이다. 성인이 숨는다는 건 성인 스스로 숨는 게 아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이 말하는 은사란 몸을 숨긴 채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고,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아니고, 지혜를 안에 간직한 채 겉에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시운과 크게 어긋나서 단지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성인이 시운을 만나 천하에 뜻을 펴면 타고난 본성과 합일의 경지에 되돌아가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시운을 만나지 못해 세상에서 버림을 받으면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죽음이 다할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이 오히려 몸을 제대로 보존하는 길이다

 옛날에 몸을 온전히 보존했던 사람은 말로 지혜를 꾸미지 않고, 지혜로 천하를 궁구하지 않고, 지혜로 덕을 궁구하지 않고 홀로 올바르게 자리를 비우면서 타고난 본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게 저절로 되었다. 사실 도는 원래 인의 따위의 작은 차원의 행위가 아니고, 덕은 원래 시비 따위를 논하는 작은 차원의 구분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차원의 구분이 덕을 해치고, 작은 차원의 행위가 도를 잃도록 한다. 그래서 옛날에 몸을 온전히 보존했던 사람은 스스로를 올바르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세속의 배움으로 처음의 자연스런 상태를 회복하길 바라고, 세속의 생각으로 처음의 밝은 상태에 이르기를 바란다. 장자는 이런 사람을 폐몽지민(蔽蒙之民), 즉 눈이 가려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면 옛날에 도를 닦았던 사람은 담담한 마음으로 지혜를 기르고, 또 지혜가 생겨나도 그 지혜로써 하고자 함이 없었다. 따라서 옛날에 도를 닦았던 사람은 밝은 지혜와 담담한 마음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길러주었는데, 이건 타고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세속의 학문이나 세속의 생각 따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옛날에 도를 닦았던 사람의 덕은 조화를 이루었고, 도는 이치에 맞았다.

 사실 덕은 모든 걸 감싸 안아야 참말로 인(仁)이고, 도는 모든 이치에 들어맞아야 참말로 의(義)이다. 그리고 의를 밝혀 만물과 친한 게 충(忠)이고,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해서 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락(樂)이고, 행동(行)·용모(容)·몸(體)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도 자연의 무늬(文)를 따르도록 하는 게 예(禮)이다. 이처럼 인·의·충·락·예는 스스로 저절로 옳아야 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꾸며서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이런 옳음만이 우리의 덕을 자연스럽게 덮는다. 또 이런 덕이라야 가려지는 일이 없다. 만약 덕이 가려진다면 만물은 타고난 본성을 분명 잃고 만다. 그러니 인·의·충·락·예가 치우쳐 억지로 행해지면 결국 천하를 어지럽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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