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떠나보내며 드리는 인사말

글.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창비 명예편집인


 오늘 제 아내 한지현(지타원 한지성)의 막재를 치르며 그동안 함께 애도하고 위로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유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교단장을 결정해주셨고 경산 종법사님이 법문을 내려주셨습니다. 좌산 상사님께서는 빈소의 독경식과 장지에서의 입장식 그리고 4재식에 몸소 오셔서 법문과 설법을 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여타원 교정원장님이 오셔서 설법해주셨습니다. 그밖에 교단의 수많은 어른과 출·재가 교도들이 조문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천도재를 주관하신 종로교당 교감님과 서울교구 교구장님께 특별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여성회 회원들은 모두가 상제인 듯 애써주셨습니다. 그밖에도 감사드려야 할 분이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단 인사들 말고도 고인의 선배·친구·지인들, 저희 가족의 친척과 친구·동료·친지들이 찾아주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분이 조화와 조전으로 위로의 뜻을 전해오시기도 했습니다. 창비사는 실질적인 회사장을 치르면서 임직원들이 대거 나서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오늘 고인을 기리는 시를 주신 고은 선생님과 발인식 때 조시를 읽어준 김형수 시인께도 특별히 고마움을 표합니다.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49재를 마치는 제 심경의 일단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실은 초재가 있던 지난 6월 25일 오전에 총부에서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저는 유족대표가 인사말을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글을 하나 써서 들고 갔었습니다. 그런 식순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만, 글을 마련하는 과정 자체가 저의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일부만 생략한 채 읽어드리겠습니다.

 “꼭 10년 전에 저는 돌아가신 어머님을 영모묘원에 모셨습니다. 그때 어머니 연세가 아흔일곱이셨습니다. 비록 흔치않은 장수였지만 요즘은 한층 고령화된 사회라 아내도 비슷한 나이까지 살았다면 한 20년 뒤에나 영모묘원에 왔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이에 제가 먼저 들어왔을 것이고요.
 이 당연한 순서를 뒤바꿔서 아내를 일찍 불러가신 진리의 뜻을 저는 아직 완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지은 대로 받는다고 하지만, 제가 지은 과보에 대해서도 어떻게 참회해야 옳은지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내가 저의 잘못을 벌주고 노년의 제 삶에서 기운을 빼려고 떠나간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저희는 다툼이 없는 부부는 결코 아니었지만, 크게 보아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길을 걷는 도반이었습니다. 아내가 떠나는 과정을 보아도, 그는 한동안 병마와 장하게 싸웠습니다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거연히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더러 그런 모습을 보고 살아남아서 더 공부하라는 숙제를 내주고 갔다고 믿습니다.
큰 슬픔을 안기면서, 슬픔의 노예가 되지 말고 희로애락을 노복처럼 부리는 공부를 해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아내의 사랑과 헌신과 뒷바라지에 그만 기대고 늦게나마 자력으로 생활하는 공부를 더 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육신으로는 영영 이별했으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를 넘어 마음의 기운을 통하면서 사업하는 공부를 해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 당부를 감당할지 아직은 막막할 뿐입니다. 더구나 아내는 자기처럼 너무 많은 일을 하다가 몸을 상하지 말고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잘하라고 일러준 것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제가 못다 지켜준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건강한 심신으로 살아가도록 애쓰겠습니다.
 동시에 아내가 품었던 뜻을 이어나가고 그가 정성을 모았던 공도사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저의 이런 노력을 평소에 지타원을 사랑해주시고 그의 타계를 애도해주신 모든 어른들과 동지들이 북돋아주시기를 기원하면서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당시 제가 준비했던 글입니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과 다짐하는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다짐을 온전히 실행하는 길이 아직 요원할 따름입니다.
  고인이 관여했던 공도사업들은 원만히 계속될 전망이 보입니다. 원불교여성회는 이미 20여 년의 역사가 쌓인데다가 후계체제가 가동된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창립회장의 갑작스러운 열반이 도리어 각성과 분발의 계기가 되는 기운도 느껴집니다. 한울안운동에 남긴 공백이 한층 큰 셈이지만, 후속체제가 재빨리 마련되었고 고인이 마지막까지 공력을 쏟았던 케냐사업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믿습니다. 복지법인 유린보은동산에서도 새로운 체제가 원만하게 출범했으며, 새 이사장님이나 상임이사님께서 전 이사장의 운영원칙을 계승할 결심이 확고하신 것으로 압니다.
 저 자신의 일로 말하면, 노년의 자력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타력을 얹어주시는 분이 워낙 많아서 그럭저럭 홀로살기를 감당해 나가리라 봅니다. 그런데 슬픔을 다스리고 노복처럼 부리는 공부만은 아직 멀었습니다.
 지난 49일간은 고인이 더욱 복되고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오리라는 믿음을 굳혀주는 시간이었지만, 그 음성 그 얼굴의 그 사람은 영원히 가고 없다는 비통한 현실이 몸에 배어드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현실에 저는 아직도 익숙지 못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아내도 자기가 먼저 간다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제가 먼저 가는데 행여 너무 일찍 갈까봐 노심초사했지요. 어느 원로교무님께 부탁해서 저를 위한 방생을 하곤 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방생은 생각도 안하면서요. 건강은 각자 챙기자고 거듭 말했지만 그것은 주로 나더러 과로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는 다그침이었습니다. “아껴 쓰자, 오래 쓰자”라고 표어처럼 되뇌기도 했는데, 그러던 본인은 아낌없이 써버리고 미련 없이 떠나간 것입니다.
 아낌없이 바친 그의 한 생이 훌륭한 삶이었음은 그동안 많은 분들이 말로, 글로, 영상으로, 그리고 몸소 찾아주시는 발걸음으로 증언해주셨습니다. 사실 고인은 너무도 많은 분야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느 한사람도 그 전체상을 알기 어렵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아니 저야말로, 예컨대 해마다 열리는 여성회의 전국훈련이 원불교 교단뿐 아니라 국내 여성 NGO계를 통틀어 유례없이 규모가 크고 내용이 알찬 모임인데도 제가 현장을 목도할 일은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에 같이 가자는 권유를 받기는 했어도 남아공이건 케냐건 한 번도 못 갔습니다. 다만 이런 사업과 행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인이 밤낮없이 전화를 돌리고 사람들을 따로 만나고 자료를 검토하며 수정하고 스스로 작성하기도 하는, 원불교에서 쓰는 문자로 ‘음부공사(陰府工事)’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제가 비교적 잘 아는 편입니다. 고인의 그런 노력과 성취가 열반을 계기로 한층 드러나고 있는 듯합니다. 세간의 칭송을 탐해서가 아니라, 고인이 골몰했던 공도사업에 힘이 되고 공도정신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점에서 반가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것이 절반의 위로밖에 되지 못합니다. 조금 덜 훌륭하게 살더라도 나의 다정한 아내로 조금 더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쓰린 마음을 달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가 미련 없이 떠난 것만은 자랑스럽습니다. 사실 아내는 이승의 삶에 미련을 품을 이유가 많았습니다. 현세의 작은 아름다움도 기뻐할 줄 알았고 자신의 역량이 필요한 공도사업에 헌신하는 환희심을 안고 살았습니다. 스스로 벌여놓은 사업들을 위해 지병을 숨긴 채 치유책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그렇게 3년 이상을 잘 보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입원을 한 뒤에도 안색이 맑고 거의 마지막까지 정신이 또렷했으며 빨리 다시 일어나 활동을 재개하려는 의욕이 강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려는 소망이 간절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마지막 한 이틀 혼수상태가 잦아지던 중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듯 훌쩍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쌓은 선업과 평소의 기도적공에 힘입은 바 컸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며칠은 기이하게도 통증이 사라졌습니다만 상당기간 신고(辛苦)를 겪으면서 업장을 많이 녹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쾌유를 비는 많은 분들의 간절한 기도의 위력을 깨끗하게 떠나도록 밀어주는 기운으로 변환하는 진리의 은총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부족함과 소홀함이 많았던 저로서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은 자의 몫은 힘겹습니다. 애착 탐착을 다 버리라고 우리는 영가(靈駕)에게 권유하는데, 육신을 벗은 영가에게는 그게 차라리 쉬울지 모릅니다. 목석도 영가도 아닌 인간의 공부길은 그보다 한결 험난할 수밖에 없지요. 인생에서 사랑은 귀한 것이고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책무이기조차 하니 거기 따라오는 괴로움과 눈물도 마다하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아니, 보통 사람들이 건강한 몸, 맑은 마음으로 누리는 일상의 행복이 곧 극락세계에 다름아니며, 극락의 행복이든 현세의 온갖 고통이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공부는 육신으로 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공부가 너무 모자라니 한참 더 하고 오라는 숙제를 아내가 주었다고 이해하렵니다. 제가 박복하여 아내를 먼저 보냈으니 복을 더 짓고 가라는 진리의 명령으로도 받아들입니다. 제게는 갑자기 적막해진 이승이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지타원과 한 마음으로 노력해온 모든 분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저를 아껴주시는 많은 분들을 믿고 힘닿는 데까지 연마하고 정진하는 것만이 저와 저의 식구들에게 베풀어주신 큰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겠지요.
거듭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저의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둥글어라
지타원

글. 고은

들어와
한집안일레
나아가
한울안일레

저녁 노을
아침 해
한세상일레

2017년 8월 6일
한지현 영가 사십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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