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리가 일깨워준 은혜

글. 강교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친구와 떠난 멕시코, 우린 깊은 정글 속 마야문명의 유적지인 치첸이사에 당도했다. 처음 보는 낯선 문명의 자취에 취해 있을 무렵, 나는 현지인 가이드와 우리가 속한 관광객 그룹을 놓치고 말았다는 걸 알았다.

 결국 외딴 유적지에 남겨진 나와 친구는 차로 3시간 거리인 숙소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고민을 해야 했다. 당혹스러움 속에서 혹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우리 그룹을 유적지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 나는 요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언뜻 들으면 영어 발음의 ‘L’과 유사한 소리였다. 주차장 한가운데에서부터 변두리까지 퍼지는 그 소리를 궁금해 하던 찰나, 한 아담한 멕시코인 아저씨가 ‘L’ 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안내하는 것이 보였다.

 그 아저씨는 관광객들을 유적지 입구에서 주차장까지 안내하며 약간의 돈을 받는 분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저씨의 음성은 주차장 전체에 가득 울리고 있었다. 무더위 속에서도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누구보다 빨리 달려 나와 낯선 이들을 버스까지 안전하게 안내하는 그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아저씨의 열정과 음성에 빠져있느라 집에 갈 생각도 잊은 채 10여 분이 흘렀다. 그런데 아저씨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L’ 소리만 냈다. 알고 보니 그는 언어장애가 있었다. 자신의 장애를 열정으로 극복하는 아저씨에게 주변의 버스기사들과 가이드, 관광객들은 격려와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지낸 시간 동안 나는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종종 자책을 했다.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인종 차별과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때면 ‘왜 나는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의 소리만으로도 저렇게 당당하고, 심지어 관광객들의 편의를 돌보는 그를 보면서 자존감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언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나보다 많은 말을 할 순 없지만 아저씨는 나에게 ‘가지지 못한 것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 볼 수 있는 여유’를 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다운 ‘L’ 소리로 알려주었다. 내가 들었던 소리 중 가장 열정적이고 행복했던 ‘L’ 소리를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도 말 한마디, 발음 하나하나에 기쁨을 담아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기도로 여는 하루

글. 허원공

 지난 하루의 무탈함과 법신불 사은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가족과 소중한 인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한 서원의 마음과, 법을 행하고 모든 것에 정성 다하고 감사하자는 마음으로 새벽 기도를 시작한다.
한땐 해이해진 마음과 나태함으로 교도로서의 생활을 등한시했었다. ‘일요일에 할 일도 많은데 법회 참석은 왜 꼭 해야 하지’ 하는 갈등이 일어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몸도 편한데,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기도를 힘들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기도하지 않는 시간이 많아졌고, 법회에 참석하지 않는 수가 늘어갔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혼란의 연속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교당에 가고 싶지만 다시 교도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고, 많은 경계 속에서 당분간 교당을 쉴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다 새 교무님이 부임하시고 첫 법회에서 ‘법신불 사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호의 찬스다. 신바람나는 교당을 만들어 보자.’는 도반들의 서원과 ‘우리는 원공을 믿습니다.’라는 외침에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래, 초심으로 돌아가서 입교 때 서원한 법신불 사은님에 대한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생활해야지. 이렇게 좋은 법을 두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깨치고 배운단 말이야. 정신차리고 열심히 적공하자.’ 하며 나 자신을 다 잡았다. 그동안 하지 않던 기도부터 하기로 서원했다.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하라’는 종법사님의 신년 법문과 메모장에서 발견한 한 선진님의 “부족한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를 정성으로 하라.”는 가르침을 새기며 행한 기도가 이제는 하루를 여는 활력소가 되었다.
법신불 사은님을 향하는 기도는 마음으로 고하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나 자신의 각오와 실천할 것을 먼저 고백하고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서원과 바람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는 사죄를 올리며 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서원에 위반이 없도록 노력한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령과 회상을 위해 새벽기도를 쉼 없이 하겠다.’고 거듭 서원하고 있다.
오늘도 서원정진을 다짐하는 기도 공덕으로 즐겁게 하루를 시작한다. 법신불 사은님이 항상 나를 지켜 주고 계신다는 믿음과 대종사님의 가르침으로 나 자신에게 공 들이고 정성 다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큰 은혜를 느낀다.
“사은이시여!  법신불 사은이시여!  기도하는 서원에 위반이 없도록  더욱 정성에 정성을 다 하겠사오니 크신 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버스킹으로 만난 인연

글. 프란스

 나는 프란스(Frans)다.
 나는 호주 뉴사우스 웨일즈 주에 있는 센트럴코스트에 거주하는 음악가다. 주로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명상을 좋아한다.

 지난 4월 20일, 워이워이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데 어떤 한국 여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장인명’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그녀의 행사장에서 몇 곡의 노래를 불러줄 수 있냐고 제안했다. 어떤 행사인지 물었더니 ‘겨울을 맞이하는 메디테이션 리트리트 데이(Maditation Retreat Day, Retreat : 가톨릭에서 침묵과 묵상과 기타 종교적 수련 행사로 심령을 단련하며 지내는 일을 뜻함)’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명상에 관심이 있었기에 비용을 받지 않고 연주를 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4월 28일에 벤스빌에 있는 호주원광선문화원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4월 24일에 우리는 리트리트 데이에 대한 회의를 했다. 나는 장인명 교무님에게 명상에 대해 관심이 있음을 밝히고, 그것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명상을 해보았다. 교무님은 그곳의 프로그램과 내가 참여할 수 있는 날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선문화원의 멤버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문화원에 방문한다.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선 시간에 참여하며, 기공이나 요가 등 명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있다.

 공연을 위해 참석했던 리트리트 데이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큼 너무 좋았다. 나는 그 이후 6월 25일에 열리는 또 다른 명상에 참여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선과 건강한 음식을 통한 명상이었다. 역시나 매우 즐거웠다.

 나는 호주원광선문화원을 매우 좋아한다. 장인명 교무님의 가르침도 매우 좋다. 교무님들은 맛있는 한국식 채식 점심과 최고의 생강차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명상이라는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과 재미있게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우리들은 이곳의 선과 기공 그리고 요가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이곳 선문화원의 한 멤버라는 게 아주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앞으로 선과 불교에 대해 더욱 공부해가고자 한다.




일상 속 작은 신화

글. 고정민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곧바로 취업에 성공할 줄 알았다.
 멋진 직장에 다니는 사회인으로, 나의 전공과 꿈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취업 시장은 얼어있었고, 나의 준비는 부족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동안, 몇 번의 계절이 지났다.

 나는 대학에서 글쓰기를 전공했다. 그러나 재화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나의 재능을, 과연 어떤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외로운 시간이면 도서관이나 카페로 향했다. 공부와 취업준비를 한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어딘지 분명한 목표는 아니었다.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느낌만 강하게 들었다.

 내 주변의 것들을 정리하고 싶어서 ‘미니멀 라이프’란 카페에도 가입했다. 방 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후련함과 동시에 헛헛한 외로움을 느꼈다.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혼자뿐인 빈방에서, 나는 꽤 큰 슬픔을 느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제 더 버릴 건 뭐지.’라고 묻는 나 자신을 발견해서였는지, 아니면 내 안의 버거운 감정과 아는 사람들까지 정리하려는 내 모습을 발견해서였는지…. 어느 순간부터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도서관이나 카페를 전전하며 세운 계획들은 자주 수정되었고, 더 많이 실패했다.

 무기력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동순 시인의 이야기와 ‘종일본가’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한 시인이 발견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장, 그리고 그 안에 쓰여 있던 ‘종일본가’라는 네 글자의 단어. ‘온종일 집에 있다.’는 뜻의 그 단어가 주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나의 마음에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자신의 외로움을 날마다 대면하며 꿋꿋이 써 내려간 한 존재의 용기 있는 태도가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날 이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다짐하며, 한쪽으로 치워버린 일상의 기억과 소중함을 하나씩 기록했다. 날마다 내 안팎의 여러 관계 맺음을 감사와 은혜로 여기는 태도를 가졌다.

 그 이후, 아직도 내 상황과 여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전보다 더 많이 웃게 되었고, 내 눈과 머리는 그때보다 더 맑아졌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상황과 만날 수 있다. 그때 여러 불편한 감정들이 발생하는 경우, 보통은 한쪽으로 배제하거나 기록해 남기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문제적 상황’ 안에 있을 때, 나만의 응전방식으로 작은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를 쓰려 한다. 일상 속 나만의 작은 신화를 만들어, 보다 큰 내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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