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하니까 그런 것이다
因是,인시

(원문)
세상만물은 저것(彼) 아닌 게 없다. 또 세상만물은 옳음(是) 아닌 게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저것으로 규정하면 스스로를 못 보고, 옳음이라 규정해야만 자신을 안다.  
옛사람은 저것은 옳음에서 생겨나고, 옳음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저것과 옳음이 함께 짝을 짓는다는 주장(彼是方生之說)’이다.
그렇더라도 한 쪽에서 태어남은 다른 쪽에서 죽음이고, 한 쪽에서 죽음은 다른 쪽에서 태어남이다.
또 한 쪽에서 가함은 다른 쪽에서 불가함이고, 한 쪽에서 불가함은 다른 쪽에서 가함이다.
또 ‘그러니까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因是因非).’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因非因是).’
그래서 성인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세상사를 조망한다.
이것 역시 ‘그러니까 그러함(因是)’에 따라 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옳음(是) 역시 저것(彼)이고, 저것(彼) 역시 옳음(是)이다.
(원문)
또 저것(彼)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고, 이것(此) 역시 옳음과 그름의 한 짝이다.
그렇다면 저것(彼)과 옳음(是)의 짝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인가, 없었던 것인가?
저것과 옳음을 한 짝으로 여기지 않으면 이것을 ‘도추(道樞)’라고 말한다.
물레의 추(樞)는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궁한 변화에 한없이 대처한다.
옳음(是)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고, 그름(非)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밝음(明)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
‘제물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도(道)이다.
물론 <장자> 전편에서도 도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장자사상이 ‘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물론’에서 도(道)라는 단어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 많은 장자 전공자들이 무심히 지나
치는 인시(因是)이다. 이 짧은 글에서도 세 번이나 등장하는데 어떤 장자 해설서도 여기를 다루면서 ‘인시’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시는 장자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 인시(因是) 개념을 우리 말로 깔끔하게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까닭’ 인(因)과 ‘그렇다’는 시(是)가 합해진 개념인데 이것만으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장자가 만들어 낸
조어(造語)이기에 장자만이 아는 개념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개념이 다른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해 장자 의도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실은 석 달쯤 후에 연재될 ‘아침에 셋 저녁에 넷(朝三暮四)
우화’에서 인시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된다.
그 우화를 통해서 볼 때 인시는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왜 그런가의 특별한 이유는 없고, 또 있더라도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시(因是) 의미를 정의하고선 이 글 내용을 하나씩 검토하며 전체 의미를 파악해 보자.
지난 달에 ‘저것(彼)과 옳음(是)이 함께 짝을 짓는다는 설(彼是方生之說)’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 때 필자가 강조했던 것은 ‘저것(彼)’은 ‘옳음(是)’에, ‘이것(此)’은 ‘그름(非)’에 각각 짝짓기 하려는 우리들의 고착된 마음, 즉 성심(成心)을 이야기했다. 물론 사람들은 반대로 ‘저것(彼)’은
‘그름(非)’에, ‘이것(此)’은 ‘옳음(是)’에 짝짓기
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저것(彼此)’이라는 어떤 대상에 대해 ‘옳음/그름(是非)’ 중 하나에다
우리들의 마음을 채색하려는 고착된 마음인 것이다.
장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이런 식의 ‘고착화(成)’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장자는 이런 고착된 마음이 “한 쪽에서의 태어남은 다른 쪽에서의 죽음이고, 한 쪽에서의 죽음은 다른 쪽에서의 태어남이다(方生方死 方死方生).”는 우주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데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한 쪽에서의 가함은 다른 쪽에서의 불가함이고,
한 쪽에서의 불가함은 다른 쪽에서의 가함이다(方可方不可).”는 세상사의 이치를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주자연에서는 태어남(生)과 죽음(死)이 단절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세상사에서는 가함(可)과 불가함(不可)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우주자연관과 세상관으로 인해 고대 동양인들은 음양(陰陽)이 연결된 태극(太極) 문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우주자연관과 세상관은 세상사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자는 이를 “그러니까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며(因是因非),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因非因是).”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언뜻 생각나는 사람이 황희 정승이다. 아랫사람들이
서로 다투다가 잘잘못(是非)을 가려 달라고 하자 황희 정승은 먼저
사람의 청원에 대해서도 옳다고 하고, 나중 사람의 청원에 대해서도 옳다고 했던 사람이다. ‘인시인비(因是因非)’, 또는 ‘인비인시(因非因是)’의 원리를 체득했기에 이런 판단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성인은 ‘특별한 이유 없이(不由) 자연의 이치에 따라
세상을 조망한다(照之於天).’ 이것조차 인시에 따른 것(亦因是也)이다. 성인은 왜 그런지의 이유를 알려 하지도 않고 자연의 이치가
그러니까 자연의 이치에 따라 처신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처신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 많은 검토와 고민 끝에, 즉 심사숙고한 뒤의 내린 결정이라야만, 또 ‘믿음직한’ 이성의
기획에 따른 사려분별 있는 결정이라야만 존중 받는 상황으로 변화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런 식의 결정방법이 내 마음을 휘어잡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삶의 지혜가 생겨날수록 과거 이런 태도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심지어 아무런 소용조차 없었던 것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성인의 자세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성인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처음부터 이런 자세를 어떻게 취할 수 있었던 걸까? 저것에도, 이것에도 옳음과 그름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들은 저것과 옮음이 한 짝이고,
이것과 그름이 한 짝이라는 고착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장자는 “저것 또한 옳음 그름의 한 짝이고(彼亦一是非), 이것 또한 옳음 그름의 한 짝이다(此亦一是非).”고 말한다. 그래서 성인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만나는 세상사에 대해 마음
편히 대처할 수 있다. 마치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자신의 몸을 한없이 의탁하는 들판의 이름 없는 풀처럼 말이다. 북쪽에서 불든 남쪽에서 불든 모든 바람은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기에, 풀은 북쪽 바람은 싫어서 피하고 남쪽 바람은 좋아서 받아들인다는 식의 고착된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 “옳음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고(是亦一無窮), 그름 역시 한없는 변화 중 하나이다(非亦一無窮也).”는 장자의 말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풀은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나무처럼 뽑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장자는 이를
한없이 움직이며 튕겨나가지 않는 물레의 추(樞)에 비교한다. 이것이 바로 도추(道樞)이다. 도추에
입각한 삶이 자연의 밝음(明)에 따른 삶이다. 삶을 마쳐갈수록 우리들은 비로소 “이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은 없다(莫若以明).”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
게 아닐까? 
| 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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