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의미를 얼게 하는 기제

 글. 김정탁

이제 <도덕경> 1장의 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검토해야 할 단계이다. 이런 검토를 필요로 하는 건 1장의 내용을 구성하는 논리가 언뜻 이해되지 않아서이다. 다시 한번 1장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도(道)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名)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런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고,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말한다.
그래서 늘 무(無)로써 만물의 오묘함을 보고,
유(有)로써 만물의 명료함을 보고자한다.
이 둘, 즉 무(無)와 유(有)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을 달리하므로
이런 같은 걸 두고 현(玄)이라고 말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많은 오묘함이 깃든 문(衆妙之門)이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런 이름이 아니다.”라는 시작부이다. 두 번째는 “무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를 말한다. 그래서 늘 무로써 만물의 오묘함을 보고, 유로써 만물의 명료함을 보고자한다.”라는 중간부이다. 세 번째는 “이 둘, 즉 무와 유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을 달리하므로 이런 같은 걸 두고 현이라고 말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많은 오묘함이 깃든 문이다.”라는 마지막부이다.

여기서 논리의 전개상 중간부와 마지막부는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시작부와 중간부는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중간부와 마지막부는 어째서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보는가? 무와 유의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중간부) 무와 유는 이름을 달리해도 같은 데서 나왔기에 이를 두고 ‘현’이라고 말해서다(마지막부). 나아가 현하고 또 현해서 많은 오묘함이 깃든 문이라고 규정해 ‘현’의 의미를 ‘문’으로 확장해서다.

그렇다면 시작부와 중간부는 어째서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보는가?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런 이름이 아니라고 논하면서(시작부) 갑자기 무와 유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기(중간부) 때문이다. 시작부에서 ‘도’와 ‘이름’에 대해 논하면 이어지는 글에선 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게 마땅한 서술 방식이다. 그런데도 이들과 관련이 없다고 보아지는 내용, 즉 무와 유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중간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작부와 중간부의 연관 관계를 풀지 못하면 1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시중에 나온 <도덕경> 해설서의 1장을 보면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시작부와 중간부의 논리적 연결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고민을 보이지 않은 채 이 부분 해석을 대충하면서 넘어간다. 필자가 1장을 해석하면서 첫 문장인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런 이름이 아니다.”로 시작하지 않고서 두 번째 문장인 “무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를 말한다.”에서 시작했던 건 이런 고민의 단면이다.
필자는 앞서 이 글의 논리가 귀납적이기보다는 연역적으로 전개된다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왜 이렇게 주장했을까? 만약 귀납적으로 논리가 전개된다면 마지막 문장인 “현하고 또 현하니 많은 오묘함이 깃든 문이다.”가 결론이 된다. 그리고 앞의 문장은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에 해당한다. 이렇게 파악하면 논리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다. 이 글을 연역적 논리로 파악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첫 문장일지라도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다.”를 오히려 결론으로 파악하고서 나머지 문장들은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로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첫 번째 전제에 해당하는 게 ‘현(玄)’이고, 두 번째 전제에 해당하는 게 ‘문(門)’이다. 노자는 무와 유가 이름을 달리할 뿐 같은 데서 나온 걸 두고 ‘현’으로 표현했다. 무와 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표면적으론 구분되어도 사실상 같아 이를 두고 ‘현’으로 규정했다. 이에 필자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현하고 땅은 황하다)’이란 <천자문>의 첫 문장을 인용해, ‘현’을 가물가물함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러니 이름만 달리할 뿐 사실상 같다는 건 가물가물한 상태이다. 나아가 ‘벽’에 의해 공간이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더라도 ‘문’에 의해 이쪽과 저쪽이 서로 통하므로 ‘문’도 ‘현’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차이가 있다면 ‘현’이 형용사로 표현한 개념이라면 ‘문’은 명사로 표현한 개념 정도이다.

노자는 즉 무와 유가 이름만 달리할 뿐 같은 데서 나왔다는 전제 하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런 이름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무와 유의 관계가 가물가물한 ‘현’의 성격을 지니거나 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문’과 같아 ‘기의=기표’는 성립할 수 없고, ‘기의≒기표’의 관계만 성립할 수 있다고 파악한 일이다. 만약 무와 유의 관계가 ‘황(黃)’의 성격을 지니면 ‘기의≒기표’보다는 ‘기의=기표’의 관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런 도라고 주장해야 마땅하다.1) 이런 식의 해석은 연역적 논리를 적용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인데 이런 해석이 귀납적 해석보다 더 타당하다.

노자는 어째서 ‘늘 그런 도(常道)가 아니라고(非)’ 주장했을까? 즉 도를 도라고 하면 어째서 2%의 의미가 부족한 도라고 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언어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란 의미를 가두는 작업이다. 그래서 의미를 언어로 바꾸는 일은 ‘냉동과정(freezing process)’에 해당한다. 냉동은 사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것이다. 막 잡은 생선을 먼 곳에 보내려면 얼려야만 중간에 부패되지 않은 채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물론 냉동을 하면 생선의 자연스런 맛은 상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시용하면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2%를 채우지 못한 채 의미가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그렇다면 도(道)를 표현하는 경우에는 2%가 아니라 20%도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에 노자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로 도에 이르지 못한다)을 주장했다. 불가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그것이다. 이심전심이란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소통방식인데, 이것은 언어라는 기표를 배제한 채 의미인 기의만 교환하는 방식이다. 불가도 노자처럼 언어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취하므로 이심전심을 강조한다.

서구 언어철학을 대표하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는 ‘말의 그림론’으로 철학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를 폐기한 뒤 ‘말의 쓰임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말의 그림론이 ‘기의=기표’의 입장이라면, 말의 쓰임론은 ‘기의≒기표’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첫 문장을 “(도의 경우처럼)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선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장식한다. 그러니 노자가 일찌감치 깨달은 언어관을 서구는 2천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셈이다.

필자가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1장을 해석하는 건 어째서일까? 필자는 유·불·선 사상을 관통하는 열쇠는 커뮤니케이션이란 주장을 평소에 펴 왔다. 공자의 이순(耳順), 불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노자의 언어도단, 장자의 제물(齊物) 등이 이를 증명한다. 여기에 더 흥미로운 점은 노자 <도덕경>이 “미더운 말은 번지르르하지 않고, 번지르르한 말은 미덥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언어에 관한 노자의 회의적 태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도덕경>은 언어관에서 출발해서 언어관으로 끝나는 셈이다. 그러니 1장을 언어철학으로 어찌 해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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