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는 그러지 않았다’ 하면 꼰대
모든 현상은 음양 양면성… 노안(老眼)으로 멀리 보고 이명(耳鳴)으로
내부 소리에 귀 기울여야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우주에는 음양이 있고, 세상엔 하늘과 땅이 있고, 밤과 낮이 있다. 그 하늘과 땅 사이엔 남녀가 있고, 인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인간이 한 행동 또한 양면성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 양면성을 못 보고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게 대개 인간의 속성이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음양을 강조한다. 양쪽의 균형을 요구하고, 세상은 균형을 필요로 한다. 한쪽이 기울어지면 우주나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균형논리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조선시대까지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마초사회였다.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사회였다는 거다. 누구나 인정한다. 아직도 마초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꼰대를 면치 못한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래서 현대 여성운동을 하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내가 “원불교 다닌다.”라고 말하는 즉시 “원불교는 남녀평등이 아주 잘 된 종교.”라고 말하며, 나에게까지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실제 몇 번 했다.

세상은 음양이 있고, 항상 균형을 유지하려는 성질 때문에 오랜 세월 한쪽으로 기울었으면 다시 균형을 이루려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다시 균형을 이루려는 단계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여권(女權)이 폭발적으로 신장하고 있어서 오히려 여권이 더 클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시 모계사회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현재 한국사회는 그런 정도다. 
인간 개인의 음양과 균형에 대해 누구나 다양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고 자기주장이 강해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그런 사람이 훨씬 많다.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유 중 하나를 추론해본다. 

나이가 들면 대개 노안(老眼)이 온다. 그런데 이 노안이라는 것은 묘하다. 가까운 건 잘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건 비교적 쉽게 보이는 현상이다. 수정체의 탄력성이 떨어져서 먼 거리는 잘 보이고, 가까운 곳은 흐리게 보인다. 또 눈의 초점이 잘 안 맞아 흐릿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 확대 해석해보자. 가까운 자신의 결점은 못 보거나 대충 흐릿하게 보고 그냥 넘어간다. 자신에게는 관대해진다. 반면 남의 잘못은 확대경을 비춘듯 크게 보인다. 나의 허물은 안 보이고 남의 허물만 더 잘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지적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의심이 많아지거나 속 좁은 좀팽이가 되기 십상이다. 듣는 사람은 노인 공경사상으로 가만히 듣고 있을까. 지금 노인들의 꼰대 같은 얘기를 듣고 있을 젊은이들은 적어도 내가 볼 때는 단 한 명도 없다.

요즘 말로 ‘젊은 꼰대’도 있다. 대학교 고학년이나 직장생활 몇 년 안 한 선배가 저학년이나 직장신입을 대상으로 말대꾸 하지 말라거나, 밥 먹을 때 선배보다 수저를 먼저 들지 말라거나 하면 영락없는 꼰대로 찍힌다. 그것도 ‘젊은 꼰대’.
재미있는 여론조사가 있다. 3월 12일부터 5일 동안 2030과 5060 각 300명에게 ‘어른’에 대한 몇 가지 같은 질문을 했다. 2030세대 답은 5060과는 많이 다르다.

20대 A씨는 “어른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은 후배들에게 역지사지 입장에서 조언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 때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때의 고민과 지금의 고민은 다르다. 진정 나의 입장을 알 수 있는가. 그냥 조언으로 경험과 방향에 대해서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B씨는 “사람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청년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지적했다. 
C씨는 “본인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나누고,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상대를 존중하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주장했고, 30대 D씨도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니다. 어리더라도 자신이 살아오면서 깨달아온 것과 삶의 가치를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여 자연히 존경받는 사람이 어른이다.”고 말해 20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반면 50대 E씨는 “연세가 많다는 것,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5060세대는 E씨와 비슷한 생각을 했고, 일부만 “나이가 많다고 어른은 아니다. 젊은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고 사고가 어른다운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다.”라고 말하며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은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됐다. 다시 말해 존경할 만한, 존경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오더라도 멀리 있는 것, 아니 남의 흠집만 지적하려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자신의 결점을 먼저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삼아 청년들의 방향을 제시해주면 훨씬 더 존경받는 어른이 되고 나아가 사회까지 안정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중요한 음양의 변화를 다시 하나 겪었다. 노안이 오면서 멀리 있는 것이 잘 보인 반면, 노화성 이명이 오면서 남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내면의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자칫 잘못하면 옹고집으로 흐를 수 있지만, 멀리 있는 것과 자신 내면의 소리를 적절히 조화 시키면 더욱 균형 있는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시 세상은 음양의 조화’라고 느껴졌다. 

눈과 귀의 노화현상을 겪으면서 떠오르는 단상 한 가지가 있다. 노안으로 남의 결점이 더 잘 보일 때마다 청력이 떨어지는 귀로 내면의 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며, 내 마음에 욕심 자라는 소리와 나의 결점을 감시하자고 다짐하면 어떨까. 음양은 역시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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