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민재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명품은 못 사고 딸기는 먹습니다’라는 표현을 보았다. 익명의 글쓴이가 자신의 소득 수준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한 문장이었다. 4인 가족이라고 말한 글쓴이는 자신과 자기 가족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어떠한 숫자도 쓰지 않고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한 문장이었지만, 그저 그런 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 뒤에 숨겨져 있을 수많은 이야기와 삶의 서사를 힐끗 드러내는 경제적 은유였다. 나는 그 표현의 참신성에 놀라면서도 두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아이가 딸기를 너무 좋아한다며 쓴웃음 짓는 한 부모의 모습과 마트에서 딸기 상자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던 나의 모습을.

명품은 없고 딸기는 ‘가끔’ 먹는다. 이것이 내 소득에 대한 경제적 은유이다. 아내가 딸기를 좋아하기에 종종 그것을 사서 먹는다. 딸기 진열대 앞에만 서면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느끼지만, 매번 용기를 낸다. 그리고 가족을 위한 작은 사치를 한다. 아 어쩌면, 딸기 포장이 ‘박스’ 단위가 아닌 ‘팩’ 단위인 건, 딸기가 쉽게 무르기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나는 딸기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

명품도 사고, 딸기도 자유롭게 사 먹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명품도 딸기도 부담스러운 이들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작은 사치가 다른 이에게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사치의 기준이 다르기에 누군가의 옷장과 밥상이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타인의 행복을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소셜 미디어에 불행은 전시하지 않으니 보이는 것은 온통 행복뿐이다. 그 행복에 비추면 내가 불행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딸기도 명품도 마음껏 소비한다. 딸기 앞에서 움츠러드는 이들은 전시된 행복 앞에서는 더욱 작아진다. 딸기만큼 작아진다. 딸기 씨만큼 작아진다. 그리고 딸기 먹기를 포기한다.

딸기는 못 먹어도 명품은 사는 이들이 많아졌다. 행복을 타인에게 전시하는 대가로 그들은 딸기를 포기한다. 실은, 나도 종종 그랬음을 고백한다. 명품과 딸기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 있냐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가치는 개인이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다만, 스마트폰 화면에 올라오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조금 더 평온해질지도 모르겠다. 멋쩍은 우쭐함도, 상대적 박탈감도 없이 주어진 자기 삶의 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지혜라고 해야 할까. 그깟 지혜가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할 테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딸기로 작은 사치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정도는 가져다줄 것이다.

내 가족을 위한 딸기는 덜 고민하고 살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말이다.   

 


 

서민재 작가님은 실용서부터 소설까지, 다양한 분야의 글과 책으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매일 읽고 쓰며, 글과 책을 짓는 방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6권의 책을 쓰고, 7권의 책을 기획했습니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