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세브란스병원 터, 화신백화점  

답사. 이성심 편집인  

 

세계인들이 한국 원불교 성지 순례를 하겠다고 줄 서는 날이 언제일까. 서울권, 전남·북권, 경상권, 금강산권, 기차역 등은 소태산 대종사의 행적이 타임캡슐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언젠가 그 캡슐이 일시에 열릴 날을 희망하며 2월 1일 월초기도를 마친 후 소태산 발자취 서울 시내 답사 일정을 시작했다. 안내는 서울 원문화해설단 이태언 교도가 동행했다. 본사 사무실이 소재한 여의도교당 인근 진주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162번 버스에 승차, 30여 분 후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서 하차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도보로 연세대 세브란스빌딩 앞에 도착했다. 이 건물은 대종사 당대 세브란스병원이 있던 곳이다. 

                                            서울로7017 고가교각 P11·P12
                                            서울로7017 고가교각 P11·P12

 

세브란스병원과 대종사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 최초 의료기관인 광혜원에서 시작하여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밭에 미국인 세브란스가 기부한 돈으로 3층 건물로 신축되었다. 이 병원에서 경성지부 임원인 김삼매화가 1개월간 입원하여 대종사가 병문안을 다녀오신 곳이다. 또 박공명선이 입원하여 열반했던 곳이다.(서문성, <원불교 경성교화②> p22) 현재 서울로7017 고가교각 P11·P12 아래는 불법연구회 전재동포구호부 사무실 터로 추정되고 있다. 

대종사는 박공명선의 열반을 예측하여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김낙원의 열반으로 상경한 대종사는 경성출장소 예회(원기 15년 8월 29일)에서 법문을 했다. 박공명선이 예회를 마치고 대중 공양을 위해 부엌으로 간 후, 대종사는 회원들에게 말했다. 

“공명선이 죽게 생겼다. 만일 죽거들랑 공주는 돈을 대고, 자연화는 총감독을 하고, 성각이는 바느질하고, 삼매화는 식사 대접을 하고 영신이는 심부름을 해라.” 경성지부에서도 신정예법의 상장례를 회원간 시행하도록 당부 하신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터에 세워진 빌딩
                        세브란스병원 터에 세워진 빌딩

대종사의 이러한 말씀에 회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예회 온 사람에게 그러십니까?” “어허, 모르는 소리. 내가 쉽게 얘기해 주마. 식은 밥하고 갓 지은 밥을 봐라. 갓 지은 밥은 멀리서도 김이 올라가는 것이 보이고 식은 밥은 가까이에서도 김 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이 모르니까 그렇지. 공명선이는 식은 밥이 되어간다.” 

박공명선의 병은 위암이었고, 10월 20일 밤에 염불하며 열반했다. <월말통신 33호>에는 ‘박공명선 씨는 실로 인간에서 보기 드문 천진심을 키우신 분이다’는 기록이 있다. 

 

종로 화신백화점과 국민복

1920년대 후반, 경성시내에 백화점이 본격적으로 등장해 1930년대에 확대되기 시작했다. 경성에는 일본인이 개업한 백화점 4곳, 조선인이 운영하는 화신과 동아백화점 등이 있었다. 화신백화점은 당시 관광 명소 중 하나였다고 한다. 1937년 건물에 에스컬레이터 2대와 엘리베이터 4대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한식당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 나들이 코스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화신백화점은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다.(조동범,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p29)

일제는 중일전쟁 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조선의 사상통일을 위하여 시국강연회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대종사께도 시국강연회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못 알아들은 척 어눌하게 하며 방편으로 넘겼다.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일본 방문을 준비하실 때 국민복을 입으시다.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일본 방문을 준비하실 때 국민복을 입으시다.

원기 25년(1940)은 일본 개국 2600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일제는 조선 내의 모든 불교를 친일단체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에게 일본에 충성 표시를 강요, 일황 만나기를 강요했다. 대종사는 몇 번을 연기하다가 결국 일본에 갈 준비를 하였다. 

대종사는 경성에 상경하여 팔타원 황정신행의 순천상회가 있는 건너편 화신백화점에서 국민복과 군모를 사서 입고, 박창기와 함께 사진까지 찍었다. 그리고 10월 박창기를 데리고 일본을 가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셨다고 한다.(서문성, 위의 책 p202~204) 

부산에 도착한 대종사는 안질을 앓고 계셨다. 이에 관해서는 <대종경 선외록> 교단수난장 1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상략) 조선총독부의 지시는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종사는 일본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가서도 안 될 일이나 가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어기는 것이 되어 그다음에 오는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대종사는 짐짓 일본에 갈 준비를 시작하였다. 박창기가 지어 올린 국민복도 준비되었다. (중략) 박장식이 먼저 부산에 내려가 대종사의 도일을 준비하였고 뒤이어 박창기를 데리고 부산 초량교당에 들렀다. 대종사는 다시 부민동으로 옮겨서 안과에 다니며 안질 치료를 하면서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어 오고 있었다. 얼마 후 전음광이 내려와 일본 방문은 안 하셔도 될 것 같다는 전달을 했다. 그렇게 성화같이 요구하던 일본 방문을 그들 스스로 취소하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대종사는 일본 방문이 취소되자 바로 총부로 환가하셨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시국에 대종사가 일본을 방문해 혹시 독립운동하는데 관련되면 거기에 따른 책임을 느껴서인지 그들이 허가증을 내주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서울에도 대종사의 발걸음이 곳곳에 함께하고 있음을…. 그러니 이 국토는 성지 아님이 없겠다.   

대종사 국민복을 구입한 옛 화신백화점 전경
대종사 국민복을 구입한 옛 화신백화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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