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길튼 교무·안산국제교당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정확히 어디일까? 혹시 우리는 엉뚱한 곳을 찾아다니지 않았을까? 그 첫발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나선 순례가 정작 다른 곳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태산, 경성역 도착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1924) 3월 30일(음 2.25) 저녁에 기차로 경성역에 도착한다.

“박공명선 58세시(갑자, 원기 9년) 음 2월 25일에 대종사님께서 제자 서중안·전음광을 데리고 처음으로 상경하시어 시내 태평여관에 드옵시었던 바…”(이공주, 박공명선 편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 제2권)

“서중안·전음광·최도화·송규 등을 데리시고 경성으로 가시었는데, 최도화의 안내로 경성에 거주하는 박사시화와 그 친제 박공명선을 만나시고…” (『불법연구회창건사』)

이 두 기록에 따르면 소태산은 최도화의 안내와 서중안이 활동자금을 대었을 것이다.

이때 내린 경성역은 ‘임시 경성역’이며 ‘길야정 전차 정류소’ 가까이에 있었다. 당시는 경성역(현 문화역서울284)을 건설하기 위해 기존의 남대문역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신축 경성역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신축하는 동안 임시 역사를 가설했고, 그곳에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1924) 3월 30일에 첫발을 디뎠으며, 5월 2일 이곳에서 이리행 기차를 타고 하행한다. 그리고 원기 9년 11월 16일~20일 사이에 두 번째 상경하였고, 원기 11년(1926) 2월 5일 이공주 3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신축 경성역을 통해 상경한다.

 

경성역 변천사

경성역의 변천을 정리하면, ‘남대문정거장’에서 ’남대문역’ 그리고 ‘임시 경성역’을 거쳐 ‘경성역’으로 이어진다. 남대문정거장은 1900년에 목조단층의 46평이라면 남대문역(또는 경성정거장)은 1915년 10월 15일에 기존의 남대문정거장을 철거하고 92평의 좌우대칭 목조 2층과 승강장이 있는 건물을 짓는다.(사진1) 이후 지금의 경성역을 세우기 위해 임시 경성역을 가설하여 1921년 12월 21일에 역무를 시작한다.(사진2) 그리하여 1922년 6월 1일 경성역 건축을 착공하여 1925년 9월 30일 준공한다. 그렇다면 임시 경성역은 1921년 12월 21일부터 1925년 9월 30일까지 3년 10개월 정도 존속했다. 

필자는 『소태산, 서울(경성)을 품다』에서 소태산이 최초로 내리신 역을 경성역이라 칭하며 당시의 경성역은 현재의 염천교 아래, 즉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 10여 평의 꼬마역으로 남대문정거장으로 불렸으며 1923년부터 경성역으로 역명이 바뀌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수정되어야 한다. 소태산이 최초로 내리신 경성역은 임시 경성역이며 염천교 아래가 아니라 지금의 서울역 자리다. 

 

임시 경성역 관련 당대의 신문 기사들

임시 경성역과 신축 경성역에 관한 당대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대한매일신보의 1921년 11월 2일자 ‘남대문 가역(南大門 假驛) 기공(起工)’ 기사가 있으며, 한 달 후 동아일보의 1921년 12월 2일자 ’남문역 개축공사‘ 기사와 몇 기사가 더 있다. 

“지금 정거장에서 연말 안에는 가(假)역사로 옮겨갈 작정임. …공사기간 중 사용할 가과선(假跨線, 넘어갈 跨) 다리는 임의 공사에 착수하여 지체가 되더라도 본년 말까지는 그 낙성이 될 예정이라 하며, 그같이 역사하는 동안에 사무를 집행하여갈 남문 가역(假驛)을 총평수 614평 목조로 하고 목하 매립 중의 구(舊)경원선 승장(乘場) 부근에 길야정 정류장과 거의 정면을 하여 건설하는 바…”(남대문 가역 기공, 대한매일신보 1921.11.2)

“공사 기간 중 역무를 행하는 역가본옥(驛假本屋, 임시 역사)은 총평수 664평 목조양철(木造洋鐵) 평옥건(平屋建, 단층)인바 목하(目下) 매립 중의 구(舊)경원선 승장(乘場) 부근에 길야정(吉野町) 정류장과 태히(히,가까이) 전혀(아주) 정면하여 건설하겠고”(남문역 개축공사, 동아일보 1921.12.2)

“공사 중이던 남대문역의 임시정거장은 요사이 공사가 준공되어 금일 중에 새로 건축한 곳으로 이전하고 명일 21일부터 임시정거장에서 사무를 취급하고, 이전 정거장을 곧 헐고 새 정거장 건축에 착수할 터라는데…”(동아일보 1921.12.20.)

“지금 길야정 정류소 앞에 가(假, 임시) 정거장을 설립하고, 개축공사 중인 남대문정거장은 1924년 여름이나 그렇지 않으면 늦어도 1924년 내에는 낙성될 예정으로 경성관리국 내에서는 요사이 정거장을 개축하는 동시에 역명까지 경성역(京城驛)이라 고쳐 조선의 중앙정거장 다운 정거장을 만들 예정으로…”(남대문역 개칭, 매일신보 1922.3.14)

 

사진 1 남대문역사진  2 임시 경성역
사진 1 남대문역사진  2 임시 경성역

 

소태산, 서울 첫발을 디딘 ‘임시 경성역’ 위치

이 기사들에 따르면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에 첫발을 디딘 ‘경성 임시역’은 구 경원선을 매립한 곳으로 길야정 전차 정류장과 가까이 정면해 있으며, 양철지붕의 단층건물이다. 길야정 전차 정류장의 위치(지도1,2)로 보아 임시 경성역은 지금의 서울역 자리로 여겨지며, 상식적으로 당시 신축 중인 경성역 공사현장을 지나서 정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문을 보면 임시역사를 남대문역사 북쪽의 봉래교(현 칠패길) 옆에 세웠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대한매일신보 1921년 11월 2일 ‘남대문 임시역 준공’ 기사에 근거한다. 

“…만철(滿轍)경성관리국이 계획 시행하는 남대문역 개축공사(신축 경성역)는 그 중 봉래정 봉래교(蓬萊橋) 옆에 보통으로 보세화물집(保稅貨物上屋) 3채(三棟) 건평 합계 3,140평은 지나간 7월로써 역사에 착수하여 9월말로써 낙성을 하고 그곳 근처의 화물취급사무소도 대략 이와 전후하여 준공이 될 터이며…”(남대문 가역 기공, 대한매일신보 1921.11.2)

그런데 이 기사가 가리키는 봉래정 봉래교 옆은 ‘보세화물집’이다. 인용 오류이다. 

위의 사진(출처: 경성정거장 신축기념 사진첩)을 살펴보면 남대문역(사진1)과 임시 경성역(사진2)의 뒷배경 산세가 거의 일치한다. 남대문역은 산 배경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찍었고, 임시 경성역은 산 배경과 가까운 위치에서 찍었다 할 것이다. 결국 두 건물은 같은 영역이나 임시 경성역이 남대문역보다 좀 뒤쪽에 있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길야정 전차 정류장’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지도1, 동그라미) 고시정-길야정-경성역전-남대문통5-남대문(남대문시장)으로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다.(지도2) 

지도 1. 출처 : '대경성도시대관' 사진첩, 1937년, 조선신문사
지도 1. 출처 : '대경성도시대관' 사진첩, 1937년, 조선신문사
지도2. 출처: '경성전차 급 버스 안내도'에서
지도2. 출처: '경성전차 급 버스 안내도'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에 첫발을 내디딘 임시 경성역은 ‘길야정 전차 정류장’을 정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서울역(사진3)으로, 경성역(문화역서울284)을 정면으로 볼 때 그 왼쪽에 있었다 할 것이다. KTX나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밟게 되는 곳이 옛 ‘길야정 전차 정류장’ 일대로 소태산 대종사께서 서울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나의 발걸음에 소태산의 발걸음이 함께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3월 30일! 소태산의 서울 첫발에 내 발걸음을 맞추어 보자.(공동연구 서울원문화해설단 박혜현·윤지승 교도)    

사진 3 옛 길야정 전차정류장 일대인 서울역 앞
사진 3 옛 길야정 전차정류장 일대인 서울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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