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키우는 바탕은 신(信)이다
 
믿음의 본성을 회복할 때
선한 에너지는 우리의 환경이 되고 마침내 화엄으로 꽃필 것이다.

글. 여도언

#장면 1
초파일이 한 순(旬) 지난 어느 사찰. 햇살이 절 마당을 쬐고 있다. 주지스님이 법당에 들어서자 신도들이 일어서서 합장한다. 스님이 법좌에 오르고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친다.
 “신도님들께서 이번 초파일 시주전에 관심이 높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지출을 매일 매일 세세히 공개하라는 요청입니다. 시주전은 사찰 보수, 스님들의 수행 뒷바라지, 보은행사, 진입로와 화장실 보수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의심, 불신, 착심을 놓으세요. 대의(大義) 없는 존재 과시는 치기, 에고, 습의 드러냄입니다. 우리는 마음공부하는 법당에서 불연의 믿음으로 만났지, 따지고 셈하는 회계적 관계로 만난 사이가 아닙니다.”
스님의 서두에 신도들이 한 번 더 자세를 곧추세운다.
“우리는 상당 부분 본성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의 상승을 막는 물질 존숭 때문입니다. 물질 본위의 환경에 젖어 영적 정체성을 잊고 생활하는 탓입니다. 종교는 믿음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즉 참마음을 회복하도록 돕는 존재입니다. 믿음을 끄고 불신을 껴안고 살려는 어리석음은 자신의 본성 이하로 살겠다는 잘못된 선택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 됩니다. 업을 짓는 이는 그 업을 스스로 짊어집니다.”
경내는 여느 때보다 엄숙해졌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스님이 법상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설법을 이어간다.
“우리가 명념할 게 개인의 불신은 개인의 책임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어그러진 행위는 이웃에게 적지 않는 영향을 줍니다. 개인의 삶은 혼자만의 독점물이 아닌 공동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내면에 새겨지고 간직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본성을 회복할 때 선한 에너지는 우리의 환경이 되고 마침내 화엄으로 꽃필 것입니다.”

#장면 2
TV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철쭉꽃이 만개한 서울의 사대문(四大門)을 구경나서는 광경을 뉴스로 방영하고 있다. ‘보신각도 꼭 둘러보아야 하는데…’하는 노파심이 든다.
옛 선비들은 오상이라 불리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공부했다. 인을 품어야 측은지심이 생기고, 의를 가져야 수오지심이 나온다. 예를 알아야 사양지심이 발현하며, 지를 얻어야 시비지심이 작동한다.
조선왕조 설계자 정도전이 동쪽 흥인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에 홍지문(숙청문으로 세워짐) 건립을 계획한 이유이다. 사대문 중앙에는 보신각이 놓여 있다. 사방의 한가운데가 신(信)의 자리인 것이다. 사덕(四德)으로 불리는 인·의·예·지를 튼튼히 쌓는 토대가 신이다. 보신각이 믿음을 숙성시켜 때가 되었음을 자각하면 종이 울리고 사대문이 열린다. 믿음이 결여되면 사덕의 개화는 허망하다.
믿음을 심어야 선한 에너지가 자란다. 불신을 키우면 악의 에너지가 핀다. 선한 에너지도 악한 에너지도 우리의 몸과 마음에 업으로 쌓인다. 기간이 오래일수록 악업을 없애고 떨쳐버리기가 힘들어진다. 내가 믿음을 가져야 내면에 선한 에너지가 생장하고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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