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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도종 중앙중도훈련원 교령 2020년01월호

교당 밖의 세상을
교화하라

성도종 중앙중도훈련원 교령

대담. 노태형 사장
정리. 장지해 편집장

그의 호적상 본적은 익산시 북일면 신용리 344-2번지다. 원불교인이라면 매우 낯익은 주소, 그렇다. 원불교 중앙총부가 바로 그의 본적이다.
인생 첫 기억이자 가장 오래된 기억 역시 중앙총부 안에서의 일이다. 세 살 무렵, 소태산 대종사 성비 건립을 위해 석공들이 돌을 다듬고 비명을 돌에 새기는 모습을 본 것이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이자 가장 오래된 기억인 것.
그때부터 중앙총부에서 성장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교무가 된 후에도 중앙총부 내 요직을 두루 거쳤으니, 성도종 교령(원로교무, 중앙중도훈련원)과 중앙총부의 인연만 해도 어언 70여 년이다. 그러니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당시 중앙총부의 모습은, 후진으로서 꺼내 듣고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집 옆엔 누구 집, 그 집 옆엔 누구 집….”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70년 전 중앙총부의 모습을 가만히 따라가며 짚다 보면, 불법연구회 인연으로 모여든 이들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남다른 원불교만의 천재적 DNA를 발견하게 된다.

● 호적상 본적이 어떻게 신용리 344-2번지가 되었나요?
“그 당시 불법연구회 인연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신용리 344-2번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불연부락·신불연부락*이라고 불렀어요. 그곳에 사는 분들이나, 그 주변에 살던 분들은 자녀가 태어나면 조실에 가서 법명을 받고 출생신고를 했는데, 그때 본적을 다들 344-2번지로 올리신 거죠. 그래서 가족이 아닌데도, 본적이 같은 동지들이 매우 많아요.(웃음)”

본래 신곳부락(지금의 신용교당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작은할아버지(성산 성정철 종사)에게 양자로 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총부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 당시의 중앙총부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익산지부라고 따로 할 게 없었고, 익산교당이 독립해 나가기 전까지 총부가 곧 익산지부였어요. 예회 날이 되면 중앙총부 대각전에 재가·출가 교도들이 다 함께 모여 법회를 봤고, 무릎을 베고 자더라도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안겨 법회를 보러 다녔죠. 소태산 대종사님 손자들도 바로 우리 집 울타리 넘어 옆집에 있었는데, 그분들은 어릴 때도 워낙 귀한 사람들이고 수재들이어서 어린 우리들조차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특별하게 대했던 기억이 나요. 소태산 대종사님 직계 혈통들은 정말 천재 집안이에요.”

● 당시 소태산 대종사 손자녀들 뿐만 아니라 초창 당시 선진님들의 자녀들도 수재였다던데요.
“불법연구회 초기에 모인 인물들이 모두 천재적인 인물들이었죠. 교단 밖에 내놓아도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 또는 수재들이 모인 집단이라서 그랬는지, 어린 자녀들에게도 ‘우리는 당연히 도인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세상에 뭔가 다른 일을 할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엘리트 의식과 자부심이 남다르게 있었던 것 같아요.”

지역의 명문 중고등학교를 두고도 ‘우리 학교가 있으니 나는 우리 학교를 간다.’는 생각으로 원광중학교와 원광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성 교령. 당시 익산에는 원광중고등학교를 낮게 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긍심이나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은 전혀 없었단다. 그때도 각 학교의 상위권은 모두 344-2번지 출신이었고, 지금도 익산에서 원친생(원불교 전무출신의 자녀들) 하면 대체로 우수한 그룹에 속하는 뭔가 묘한 DNA가 있는 것 같다고도 전하는데….

● 그런 DNA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우리 선진들이 다, 일제 강점기 그 어려운 시대에 소태산 대종사님과 같은 성자를 알아보고 뭔가 세상을 위해 살겠다는 뜻을 가지고 모였잖아요. 정산 종사님을 비롯해서 대산님, 상산님, 혜산님, 주산님… 세상 밖으로 나가도 주름잡을 수 있는 능력과 포부를 가지셨던 그런 분들이 소태산 대종사님이라고 하는 집군성이대성*을 알아보고 모였고, 우리는 그런 제자들의 후예이기 때문에, 뭔가 남다른 DNA가 이어져 오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중앙총부에 살던 사람들이 ‘우리는 천재다.’라는 생각은 특별히 안했어도, ‘우리는 세상을 앞서간다.’ 라는 마음은 가지고 살았으니까요. 익산 북일면에 적게 몇십 명이 모여 사는 불법연구회이지만, 세상의 빛이 되겠다고 하는 자긍심과 자존감이 남달랐던 분위기가 있었어요.”

작아도 알고 보면 천재적인 집단이었던 당시 불법연구회의 분위기는 교단 초창의 역동성으로 이어졌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욱, 우리 교법에 대한 자신감과 정성으로 계승 발전하려는 사명감이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하는 성 교령이다.

● 총부 구내에서 자랐으니, 자연스럽고 평탄하게 이 길을 선택했을 것 같은데요.
“나름대로 치열한 방황의 시기가 있었어요. 학창 시절에 본가와 중앙총부 집을 오가면서 이 집도 저 집도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묘한 반항심이 생겨서 ‘나는 기필코 신학대학에 가리라.’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었지요.(웃음)”

‘어차피 나는 원불교에 뼈를 묻을 사람이고 뼛속까지 원불교인인데, 기왕 원불교를 발전시키려면 세상을 알아야겠다. 특히, 다른 종교를 정통해서 교단에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명분 삼아 세운 목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풍파가 잦아들고 ‘역시 이 길이 내 길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원불교학과 진학을 결심했다는 그다.

● 평소 화내는 모습을 못 본 것 같은데, 화를 낼 때도 있으신가요?
“인간 대 인간, 혹은 사람을 향해서는 별로 화내본 적이 없어요.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어릴 때 도량 안에서 따뜻한 사랑과 훈증을 받고 살다가 간혹 본가에 가면 꾸지람을 들었어요. 내가 생각할 때도, 주변에서 볼 때도 나는 모범생인데 어른들 관점에선 부족한 점이 있었겠죠. 하지만 그때, 저는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거나 혼나거나 매를 맞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과연 내가 흔쾌히 수긍하거나 승복했던가 생각해보면 그랬던 기억도 별로 없어요. 그런 경험을 갖고 성장해서인지, 사람을 꾸짖는 방식으로는 교육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게 신념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미워하는 마음으로 지도하거나 가르치거나 충고하는 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의 눈빛에는 늘 상대를 향한 애정과 인자한 미소가 담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를 향해 화를 낸 적이 없을까. “있기도 했지만, 상대가 볼 땐 ‘화내봤자.’라고 생각하는 정도였을 것이다.”라며 허허 웃는 그. ‘특히나 젊을 때는 화를 내면 나의 헝클어진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되도록 자제 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젊은 교역자들이 많습니다.
“학생 시절에 각산 종사님을 모시고 모임 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말씀 중에 ‘여러분은 스페어타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 깊게 남아있어요. 스페어타이어에 바람이 빠져있으면 결정적일 때 차를 굴릴 수가 없잖아요. 마찬가지에요. 교단에는 할 일도, 필요한 인재도 많아요. 물론 지금, 우리 젊은 후진 세대들의 현실이 매우 어렵죠. 하지만 그것은 성장통이라고 여기고, 겪어야 할 통과의례라고 생각하고, 서원을 가지고 이 길을 나선 이상 서원의 실현을 위해 쓸모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해요. 준비된 사람만이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안팎으로 실력을 쌓으세요. 준비돼 있으면 반드시 부름이 있어요.”

그가 가장 꼽는 보람은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설립인가를 위해 일했던 때이다. 최종교육과정의 골격을 완성시키기 위해 교직원들과 교육을 받을 학생들의 의견까지 적극 수용해 커리큘럼을 완성했던 것. 그중 실습학기 제도를 도입해 세상을 체험하고 새로운 환경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한 건, 당시 교단에 개척·모험·도전의 에너지를 활발하게 일으켰다. 그뿐인가. 총무부장을 할 때는, 인사위원들을 설득해 출가식을 갓 마친 부교무들을 개척현장으로 내보내는 시도도 했다. 의외의 면모가 엿보이는 사례들이다.

● 도전의 기회를 열어주는 시도를 많이 하셨네요.
“우리가 있는 교당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교당 밖의 세상을 교화해야 하는데, 교당교화만이 교화라고 협소하게 인식하는 생각이 오히려 우리를 더 옥죄는 것 같아요. 세상을 향해 소태산 대종사님의 개교정신을 구현하는 현장으로 과감히 나가는 가운데 우리의 사명감과 전무출신 정신, 교화자로서의 자세가 더 충만해져요. 거기에서 보람도, 교화의 발전도, 교단의 성장도 이룰 수 있는 거죠.”

● 미래 시대에 맞는 종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급변하는 시대로부터 오는 변화와 혁신의 압박을 일단 인정하고, 그럴수록 진정으로 기본에 충실해야 해요. 종교 본연의 목적이 무엇이고, 우리가, 우리 원불교가 이 세상에 무엇을 하기위해 등장했는지 끊임없는 성찰을 해야죠. 계몽 시대에는 종교의 역할이 많았지만, 이제 계몽적인 역할은 정부나 사회의 기관과 단체들이 다 담당하고 있거든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가치와 이념, 결국은 ‘영적인 성숙함, 참다운 삶,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춰야죠. ‘종교는 종교다.’라는 기본이 어려운 시대를 돌파할 관건이에요.”

●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나의 소종래’ 즉, 내가 피은자라고 하는 생각이 의식화되어 있었어요. 결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교리적으로 말하면 ‘사은의 가호 아래’ 나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피은자로서 보은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사람다운 삶이자 공부인의 기본이라고 생각한 거죠. 거기에 전무출신으로서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爲公忘私: 법을 위해 몸을 잊고 공을 위해 사를 잊는다는 뜻) 해야 한다.’는 마음이 합쳐져서 살아온 것이 현재의 제가 된 것 같아요. 지혜롭고 잘 살기 위해서는 가깝게는 가족에서부터 스승님, 동지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 천지만물과 한 가족·한 형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