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케냐로 떠나다
글. 한제은 교무

  아프리카 스와지랜드로 발령받았던 내 동생 한수녕 교무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동생은 다시 아프리카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그 길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아프리카 53개국의 정보와 지도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파일로 만들고 늘 연마하는 그 정성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였다. 함께 연마를 하던 중, 교단 내에서 숭산 박길진 선진님과 아타원 전팔근 선진님이 진작 케냐에 다녀가셨던 것을 알게 됐다. 교무님 중에 나이로비 대학에서 유학을 했던 분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케냐정부가 종교의 법인 설립도 허용한다는 것도….

  그러던 중 원광대학교에 소속된 몇 분이 모여 아프리카 ‘물사랑나눔회’를 만들자고 하여 부푼 꿈을 안고 합류하였다. 우물을 만드는 사업인데, 현지에 와서야 잘못된 것을 알았다. 여기는 200m이상 파고들어가 암반을 뚫어야 지하수가 나오는 곳인데, 우리 팀이 가지고 간 기계는 손으로 돌려서 굴착하는 것이라 성공할 수 없었다. 그냥 돌아갈 수 없어 기존에 있는 지하수에 파이프를 연결하여 몇 군데 학교에 물탱크를 만들어 주고 돌아왔다.

  그분들은 또 다른 제안을 했다. 흐르는 개울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건기(乾期)에도 농사를 짓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목공사 부실로 비만 오면 모두 떠내려갔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와 동생은 “우리 스스로 일을 찾아보자.”고 마음먹고 길을 찾기 시작했다. 수녕 교무가 먼저 케냐에 와서 카지아도 지역답사를 통해 의료기관이 없는 곳에 작은 보건소를 만들기로 하였다. 승낙을 했지만 자금 만들 길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동기교무로부터 “임실요양원에서 간호조무사를 구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 나는 전주 호성교당에 근무 중이었는데, 시간이 허락되어 요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받은 인건비 일부는 호성교당 유지비로, 일부는 케냐보건소 설립에 사용했다. 동생이 케냐 가는 것을 수없이 만류하던 나는 그렇게 점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케냐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내 힘으로 감당이 안 되는 동생을 보면서 부모라면 자식을 포기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함께하기로 결국 마음을 세웠다.

  원기 96년 법인기도를 마치고 상사님을 뵈러 갔더니 “케냐로 가거라.” 하시며 “지타원 한지성님을 만나 봬라.”고 하셨다. 지타원님은 그동안 세 번의 케냐방문으로 세워진 보건소 자료를 보시고 “저를 믿고 가십시오.”라고 하셨다.

  우리 남매는 원기 97년 정식인사 절차에 따라 케냐개척교당으로 사령장을 받았다. 종법사님의 “갔다가 힘들면 빨리 오너라.”는 위안의 말씀을 가슴에 안고 6개월분의 경비와 왕복 비행기 티켓만 가지고 오른 길이었다. 원기 97년 1월 13일에 케냐에 도착한 우리는 은공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수시로 은공언덕에 올라 넓은 대지를 향해 우리가 할 일과 교당이 세워질 곳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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