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이사 가요?

아들의 물건을 알아보는 건 어머니,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니까.

글. 이왕혁

 벌써 몇 달째, 할머니는 말일마다 대청소를 반복했다. 그 대단한 규모만큼이나 우리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 먼지도 먼지였지만, 청소 후 남겨진 쓰레기봉투는 성인 남자만한 크기였다. 물론 그것은 허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아닌 우리가 처리해야 할 몫이었다. 대체 이런 물건들이 어디에 다 숨어있다 나오는 건지…. 버리고 또 버려도 매달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이 신기해서 언젠가는 할머니를 몰래 감시한 적도 있다. ‘혹시 동묘 같은 곳에서 버릴 물건들을 사 오시는 건가?’ 그러나 할머니는 결백했다. 오히려 우리의 비밀 감시를 알아채 마음이 상하셨는지, 손주들이 암만 볼멘소리로 말려도 들은 체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좋으세요?

 3년 전, 진짜 이삿짐을 꾸릴 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너희들이야 그냥 잠자리 바뀌는 것뿐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보금자리를 옮기는 일이다.”라며. 이사는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조왕신-성주신들 모시고 거기서 새로 태어나는 일이라며,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조상신들과도 온종일 오순도순하시던 할머니였다.

 그러나 지금의 할머니는 그때와 달리 웃지 않으셨다. 기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옷을 개어 쌓고, 그릇을 넣고 빼고, 종이를 묶어 버리실 뿐이다. 그렇다고 그때의 이사와 지금의 청소가 엄청나게 다른 것도 아니다. 단지, 그때는 새 집에 풀어놨던 짐을 지금은 버려야 할 이삿짐으로 분류했고, 그때는 옆에서 할머니를 돕던 삼촌이 지금은 도울 수 없게 되었다는 것밖에는 다를 게 없었다.

다녀오마

 우리가 청소라 부르는 이사가 시작된 그달 말, 할머니는 동사무소에 가셔야만 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아들의 사망 신고서를 쓰셨고, 집으로 돌아와 마치 이사 같은 청소를 시작하셨다. 그래야 여기의 당신과 거기의 당신 아들이 새로 태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미처 태우지 못한 아들의 물건을 정리하며 딱 그만큼의 슬픔을 덜어내셨다. 마치 한 번에 모든 눈물을 빼낼 수 없듯, 조금씩 과거의 추억들을 쏟아내셨다. 지난 몇 달간의 청소는 당신과 당신 아들의 보금자리를 옮기는 할머니만의 이사였기에, 우리에게는 처음 보는 물건투성이였던 것이다. 아들의 물건을 알아보는 건 어머니,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니까.

버리고 와라

 삼촌의 만년필을 몇 분째 만지작거리시던 할머니는 마침내 그것을 봉투에 넣으셨다. 이와 동시에 지난 몇 달간의 기나긴 이삿짐 싸기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마지막 봉투를 내미는 할머니의 얼굴은 말 그대로 시원함과 섭섭함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는데, 나와 동생은 시원함과 섭섭함의 지분을 두고 티격태격하며 마지막 이삿짐을 버렸다. 그리고 오는 길에 지난달처럼 자장면을 시켰다. 아니, 오늘은 짬뽕에 탕수육까지 시켰다. 셋이 먹기엔 많은 양이지만 할머니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이사가 끝난 날이니까.


1+1=1, 특별했던 이사

‘결혼’ 그 자체보다도 서로의 공간과 물건을 결혼시키는 것이
훨씬 어려웠고 재밌었다.

글. 장혜인

 얼마 전 특별한 이사를 했다. 서울에 올라온 지 10년, 그 동안 숱한 이사를 했지만 이와 같은 이사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사는 앞으로도 마지막일 것이다. 결혼으로 인해 살림을 합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생활을 꾸린 경험이야 여러 번 있었다. 기숙사 생활도 거듭했었고 때로는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했으며, 심지어 친구와 한 방에 살기도 했었다. 그동안의 이사는 공간의 구조와 크기에 상관없이 ‘1+1=2’와 같은 단순 결합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번 이사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새 살림’을 꾸린다는 것은 ‘1+1=1’, 서로의 것을 섞어 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일이었다.

 우여곡절은 짐 싸기부터 시작되었다. 이사 일주일 전부터 서로의 집에 들러 짐 싸기를 도왔다. 그와 나는 오랜 기간 자취를 해왔기에 가진 짐이 많은 편이었다. 그만큼 묵혀둔 물건들도 많았을 터. 우리의 짐 싸기 기조는 ‘미니멀리즘.’ 최대한 버리고 줄여보고자 의기투합했다. 한쪽에서 박스에 차곡차곡 짐을 채우고 있으면, 저쪽에서 연신 질문이 날아왔다. “이 컵은 선물 받은 건가?” “이런 옷은 언제 입던 거야?” “어, 나도 이 책 있는데.” 자연스레 책과, 옷과, 컵에 얽힌 나의 에피소드, 나만의 히스토리를 그와 나누게 되었다. “아, 그건 말이야… 내가 고등학교 때….” “그 책은 여행가서 우연히 산 거였는데….” “나랑 친한 친구 그 애 있잖아, 그 친구가 예전에 사준 건데….” 내심 버려도 되는 건가 싶어 물었던 질문은 도리어 추억 가득 묵직해져, 어느덧 그와 함께 나의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 되어버리곤 했다. 

 이윽고 이삿날, 그의 집을 거쳐 나의 집에 들러 짐을 한가득 실었다. 용달차 한 대에는 우리의 짐이 차곡차곡 그리고 빼곡하게 찼다. 새 집에 짐을 풀어놓으니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짐 정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먼저, 옷, 책, 주방용품, 세탁 용품 등 항목별로 서로의 짐을 모으고 그걸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를 논의한 후, 서로가 가진 것들 중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웬만하면 각자의 것을 남기려는 설득이 은연중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은 추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나는 ‘내게 남은 물건엔 나의 역사가 깃들어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추억을,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에게 미니멀리즘이란 쉬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결혼한 지 한 달째, 우리는 아직도 짐의 일부를 정리하며 서로의 추억 한 조각, 서로의 역사 속 한 장면을 공유해간다.

 <서재 결혼시키기>라는 책이 있다. 제목에 매료되어 끌렸던 책인데, 저자는 남편과 책장을 합치는 과정을 통해 책에 대한 애정이 새삼 샘솟았다고 고백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그 자체보다도 서로의 공간과 물건을 결혼시키는 것이 훨씬 어려웠고 재밌었다. 서로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재발견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서로에 대해 보다 깊숙이 알게 되고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살림을 합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결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비록 미니멀리즘의 추구라는 목표에는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지만, 맥시멀리스트로 남아있는 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욱 두텁게 할 수 있었다. 내게 이번 이사가 특별했던 이유다.


동생의 일기장

귀여운 10살이 썼다고 하기엔 내용이나 목표가 상당히 구체적이기도 하고,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

글. 송경희


 작년 이맘때 즈음, 우리 집은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편하게 포장이사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집 정리를 핑계 삼아 반 포장 이사를 했다.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각자 자기 물건은 자기가 정리하기로 했지만, 나는 타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막내 동생의 짐 정리까지 맡게 되었다. 남동생의 방은 나에게 보물 상자와도 같았다. 정리를 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재미있는 것들이 나왔다. 마치 다이아몬드광산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서랍과 책들 사이사이에는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쪽지와 풀지 않은 학습지, 시험지와 성적표는 물론이고 일기장 그리고 반성문 등이 끼워져 있었다. 그 중 이삿짐을 싸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게 한 것은 바로 일기장을 정리할 때였다. 정리를 핑계로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읽다가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면 주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깔깔거리며 웃느라 시간이 더욱 소요된 것이다.
 남동생의 일기장에는 주로 태권도학원 이야기와 누나들이 자신을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그중 3학년 때 쓴 ‘내가 어른이 되면?’이라는 제목의 일기 내용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한테 용돈을 10만 원씩 드리고, 정읍 할아버지 댁을 이쁘게 다시 지어드리고 싶다.’ 귀여운 10살이 썼다고 하기엔 내용이나 목표가 상당히 구체적이기도 하고,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 그 당시 정읍 할아버지네 옆집이 새 단장을 했는데, 동생은 어린 나이에도 그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느긋느긋 짐 정리를 한창 하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남동생이 집으로 들어섰다. 다음 달 엄마 생신 때와 시험 기간이 겹쳐 미리 내려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사 간 집에서 보여주기 위해 잘 챙겨놓은 동생의 학습지와 일기장, 반성문 등을 다시 꺼내 동생에게 보여주었다. 동생은 내가 그랬듯 그것들을 한참 동안 뒤적거리며 읽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동생의 옛날 일기장에 적힌 이야깃거리를 안주삼아 오붓하게 맥주를 한 잔씩 나누면서 엄마 생일파티 겸 이사전야제를 즐겼다.
 동생의 과거는 다시 고이 이삿짐 박스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보물 상자처럼 두고두고, 언젠가 다시 꺼내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사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내 동생은 강원도 고성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다. ‘경석아! 누나는 지금도 너의 사진과 일기장을 한 번씩 꺼내보며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남은 군 생활 건강하게, 열심히, 긍정적으로 잘 보내고 오길 바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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