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생명력은 개혁성

변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바람과 종교 지도자의 역량이 서로 어우러질 때,
새로운 이상사회를 추구하게 되는 강렬한 종교운동이 발생된다.

글. 김도공


 보통 종교와 종교인을 보수적이라고 한다.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보수적 역할이 종교와 종교인의 임무라고 말한다. 혼란한 시국이 되면, 종교계 원로들을 둥그런 원탁에 모셔놓고 사회를 안정시킬 혜안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적 혜안과 생명력은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는 통렬한 개혁성에 있다.
생명력 있는 종교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종교가 새롭게 태동될 때, 그 모습을 보면 더욱 명확히 볼 수 있다. 사성계급의 타파를 외친 석가모니도, 특정 민족만의 구원을 세계인의 구원으로 확대한 예수도, 남녀노소 반상의 차별을 혁파한 원불교의 소태산도 모두 다 그 당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강력한 개혁성을 선명하게 들고 나온 것이다. 
 
 소외계층에 대한 새로운 구원의 길,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탈출의 통로, 사회적 현안에 대한 두려움 없는 혁신, 이런 개혁성이 있었기에 민중들의 여망에 부합하는 새로운 종교가 된 것이다. 변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바람과 종교 지도자의 역량이 서로 어우러질 때, 새로운 이상사회를 추구하게 되는 강렬한 종교운동이 발생된다. 이때 종교의 모습이 가장 생명력 있는 모습을 띤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이상사회론은 강력한 사회 개혁성이 그 생명력이다. 종교적 이상사회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제시되고, 미래사회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개혁의 대상은 현실이지만, 개혁의 지향점은 이상적이기 때문에 현실과 이상은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종교적 이상사회란 실제로 이뤄지기는 힘든 미완성의 사회이다. 영원히 이루어지기 힘든 이상적 사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이상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고 여기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로써 역사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실제 종교적 이상사회가 완벽하게 이뤄진 적은 없었다. 어찌 보면 이룰 수 없는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적 이상사회를 실제 이룰 수 없더라도 그 방향을 향해가는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는 그 과정에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종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은 고통과 부족함이 없는 평화, 안락, 풍요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만이 아니다. 또 암울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심리적 만족이 아니다. 종교적 이상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치열한 추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비록 이룰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방향을 향해서 가야한다. 그곳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종교의 생명력이 나오는 것이다. 현실사회 속에서 이뤄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종교적 이상이다. 완벽한 이상사회를 이룰 수 없더라도 그곳을 향해가는 과정의 의미, 목표 있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정 종교가 가장 종교적이었던 순간은 역사적 시대적 변혁기였다. 원기 100여 년을 넘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원불교,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낙원으로 인도하려 했던 원불교, 과연 변화하려고 하는가? 애초에 목적으로 한 그 곳을 향해 가고 있는가? 원불교는 생생한 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 생명력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물음이 자꾸 많아지는 요즘이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