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바꾼 가족들과의 만남

서러움과 미안함에 혼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글. 강명권

우리 고시원에는 장애인 형제가 살고 있었다.
원래는 장애가 없는 형제였다. 형은 결혼을 하여 아들과 딸을 두고, 사업까지 할 정도로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동생 역시 대기업에 취업하여 직장을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 몸이 힘들고 피로가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그즈음 형도 시름시름 아파갔다.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서울에서 다시 검사를 하였고, 루게릭병과 비슷한 케네디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운동신경세포 사멸로 신체근육이 약화되어 나중에는 걷지 못하고 누워서 살아야 하는 병이었다.
형의 가정은 치료비로 인해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아내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버렸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보았지만 형은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 동생도 병이 진행되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후 형을 모셔와 같이 고시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두 형제를 만난 것은 은혜고시원을 운영하면서부터다. 그들은 봉공회가 고시원을 인수하기 전부터 거의 1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형은 벽을 잡고 일어서서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계단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동생도 지팡이를 짚고 4층 고시원을 혼자 올라 다녔다. 동생은 형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근력운동을 쉬지 않았다. 병원에 갈 때면 동생이 먼저 휠체어를 타고 형은 동생의 무릎에 앉아 왕복 3시간의 거리를 다니며 힘겹게 살았다. 그렇게 두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형의 병은 심해졌고, 몇 달간 중환자실에서 고생을 하다 열반하셨다. 가족과 형제가 있었지만 장례식은 하지 않았다. 자녀들과 형제 몇 분이 유골을 거두어 산에 뿌렸다. 아들과 딸은 아버지가 화장막에 들어갈 때 잠깐 울음을 보였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슬픔으로 보이지 않았다. 형제들도 슬픔보다는 이제 잘 정리가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안타까웠다. 그나마 장례식을 통해서라도 아이들과 형제들을 만났을 그분이, 웃음을 띠고 가셨을 것 같아서 조금의 위로를 느낀다.
동생은 다른 형제들과 불편한 관계이기도 하고, 휠체어 없이는 갈 수가 없다면서 장지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고시원 총무에게 들으니 서러움과 미안함에 혼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돈을 벌어줘야만이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집안의 장애인은 형제나 가족의 관계에 끼지 못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만 같아 너무 아프고 안타깝다.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라고 하지만 아직 가난한 장애인으로 이 땅에 살아가기에는 너무 힘든 구조인 것 같다.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낙원세계는 이런 세계가 아닐 것인데, 과연 그 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후원 | 우리은행 1005-202-256361 재단법인 원불교   문의 | 원봉공회 02)823-4438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