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롭고 쌉쌀한 그대

얼마나 애틋하게 기다려야 만날 수 있었는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었다.

글. 강유미

그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에 만났다. 아무도 모르게, 내게 다가왔다. 고백하자면, 또렷한 기억은 없다. 그래도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보겠다.
햇볕에 그을린 듯 까무잡잡한 피부, 좋은 목소리를 가졌었다. 그 아이에게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다. 어린 나이에 받은 느낌을 성인이 되어 표현하려니, ‘어른 아이’ 같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그때도 지금도 그 아이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남아있으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아이를 만난 건 수학과 체육을 못해 평균 점수가 질질 끌 때였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후회했을 거다. 얼마나 애틋하게 기다려야 만날 수 있었는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었다. 그 첫사랑을 어렴풋이나마 다시 글로 남기게 돼 다행이다.
누구냐 하면, 바로 ‘COFFEE’이다.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때 커피를 만난 이후 커피 덕후가 되었고 지금은 커피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의 손님들이 집으로 놀러와 쉼 없이 수다꽃을 피울 때 모카색을 띤 커피, 과일, 맛깔스러운 빵은 항상 함께였다. 초콜릿이나 과자나 간식거리가 있는데도, 나는 엄마의 손님들이 모두 간 자리로 허겁지겁 달려가 커피 잔을 확인했다. 엄마는 뭐든 바로바로 치우고 해결하는 성격이라 한발이라도 늦으면 기회를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커피 잔에 고운 빛깔을 가진 커피가 반 정도 남기도 한다. 그럴 땐 한 모음 홀짝홀짝 마시고, 커피가 딱 한 모금 정도 남았을 땐 얼른 식빵을 찾아 커피에 담가 빵에 촉촉이 적셔 먹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스피드! 언니와 둘이 현장탐색이라도 하듯 다과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엄마 몰래 쌉쌀하면서도 끝 맛이 달콤한 커피를 마셨다.
별다방, 콩다방… 셀 수 없이 많은 프렌차이즈와 ‘저게 커피야?’라고 느낄 정도로 너무너무 많은 종류의 커피들이 쏟아져 나온다. 난 아직 촌스러운지 야근할 땐, ‘아자아자 다방커피’를 마시거나 터질 듯 배가 부를 땐 정신이 바짝 나는 검은 커피만 마신다. 다른 커피는 이름도 어려워서 시킬 엄두가 안 난다.
첫사랑이 커피라는 데 실망하셨나? ‘신의 열매’라고 불리는 커피와 나의 만남은 그만큼 내 삶에 활기와 여유를 주는 소중한 존재라 그런가 보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 사람이든, 사물이든, 내 맘을 사로잡은 첫사랑이면 아무렴 어떤가? 힘들다, 힘들다, 보이지 않는 희망에 지칠 때가 많지만, 그때마다 나의 첫사랑 커피를 음미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체질 개선

사실 체질보다는 바뀐 내 모습이 서글펐다.

글. 신은혜

체질 개선을 시작했다. 점점 더 소화하기를 거부하는 몸을 달래기 위해 식습관도 바꾸고 생활습관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른이 되니 바꿔야 하는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릴 때는 멜로가 체질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수능 만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1년에 몇 명은 있는 것처럼, 영원한 사랑도 어딘 가엔 존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사랑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고 슬퍼서 지금 내가 하는 사랑이 영원한 사랑임을 증명받으려고 오히려 상대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다. 내가 정성 없이 대해도 상대가 계속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그야말로 영원한 사랑의 증거라는 어린 생각. 그래서 계속 같은 실패를 거듭해왔다. 좋아하던 어느 멜로영화 대사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며 엉엉 울곤 했다.
멜로 영화 주인공에 심취하여 술로 밤을 지새우던 그때는 눈물과 함께 술술 넘어가던 술들이 왜 이제는 조금만 마셔도 위장벽을 두드릴까. 나는 자연스레 체질 개선을 하게 됐다. 퇴근길 나를 달래주던 맥주 한 모금은 무너지는 위장벽 덕분에 자연스레 멀어졌다. 가족들의 잔소리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흘려보내고, 직장 상사의 히스테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깨부수며 해소하게 됐다. 이별의 아픔이나 친구들과의 다툼보다 통장 잔고를 더 걱정하게 되는 나이가 되면서, 간질간질한 멜로 영화보다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줄 때리고 부수며 맘껏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더 찾게 됐다. 정신없이 일만 하며 살다 보니 체질도 바뀌고 영화 취향도 바뀌었다. 가끔은 그런 내가 낯설고 싫어, 억지로 ‘멜로’ 장르를 검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PLAY 버튼은 쉽게 눌리지 않았다. 한 번 변한 체질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체질보다는 바뀐 내 모습이 서글펐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이 아쉬워, 변한 내 모습을 미워했던 거다.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어렸을 땐 멜로 영화가 아닌 디즈니 만화를 좋아했었으니까. 사실 나는 타고난 멜로 체질은 아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서글픈 일도, 무서운 일도 아닌데, 그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인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바뀌는 체질이 그리도 싫을까?
아마도 그건 가끔,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리는 멜로 영화 주인공들이 그리운 까닭일 거다. 그 시절 내가 봤던 멜로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니까. 그건 내 젊은 날의 체질이니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지난 과거들….
지친 퇴근길. 돌아오는 버스에서 얼마 전 재개봉한 ‘쉘부르의 우산’을 예매해본다. 그래도 어쩌면 아직은, 멜로가 체질일지도?


연애, 그 씁쓸함에 대하여

모든 문제가 다 나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글. 김윤도

2월 13일. 일본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군대를 전역한 후 처음 만나는 이성이라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이 그냥 좋아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서, 더욱 다가가고 싶었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그 사람과 잠깐 연락하는 순간만으로도, 그 날의 모든 순간이 행복해졌다. 처음에는 나의 일방적인 마음 표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짧은 시간들이지만 저녁을 함께하고, 카페를 같이 가고, 영화를 같이 보고, 서로의 일상에 비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상대방 또한 나에게 마음을 표현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 감정만 있었다면, 친해지고 난 후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구 같은 관계를 원했던 것인지, 이성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음에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막연히 이 사람을 더 오래 보고 싶고 이 사람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고백을 하고,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어색한 부분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나아가는 과정일 거라 생각하며,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서로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워 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는 마음과 동시에 ‘내가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 ‘이 사람은 나와 있으면 즐거울까? 행복해할까?’ 같은,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는 생각들도 같이 자라게 되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좋아하는 감정들보다 내가 이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게 미안해졌다. 내가 아니면 좀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더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좋아서 시작하자고 했던 관계였는데, 나중에는 이 사람이 나와 있을 때 행복해하는,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모든 문제가 다 나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변화하지 않아서,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서, 처음의 좋았던 모든 느낌이 이렇게 안 좋은 방향으로 다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내 생각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상대방 또한 확신이 없는 나의 모습에 점점 지쳐가고,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인지, 어디서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작스럽게 시작했던 인연은 그렇게 한순간 무너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처음 좋아했던 사람. 내가 처음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나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던 짧은 사랑. 이미 끝나버린 사랑이지만 그때의 순간이,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 마음에서 맴돌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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