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해라

정리. 조예현 기자

“성경(聖經)이라 해라, 앞으로 할 일이 있다. 이름값 해라. 신심과 공심으로 잘 살아라.”
명타원 민성경 종사는 총부에서 소태산 대종사님을 배알하고 그 자리에서 친필로 법명을 받았다. 이후 흐트러짐 없이 대종사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무명성자이다.
명타원은 대종사께 직접 들은 말을 기억한다. 대종사께서 대각 후 상황에 대해 “내가 그 때 너무 기뻐서 버선발로 다닐 때 발이 땅에 닿는지 몰랐다”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고. 지금 원광대학 자리가 그때는 높은 황토밭이었는데 저녁에 산책을 가셔서 “여기가 크게 배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고 하셨단다. 교통수단도 별로 없던 그때, “앞으로 신작로에 참기름을 바른 듯이 길이 새카맣게 번질번질하고 그런 세상이 와서 사람이 빨리 빨리 다니고 그럴 것이다. 나는 못 보지만 너희들은 그런 세상을 다 볼 것이다”라는 말씀도 받들었다.
그때는 무슨 말씀인지 몰라 그냥 스쳤는데, 도로가 나서 아스팔트를 까니까 성경은 ‘종사님이 참기름 바른 것 같이 길이 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셨구나’하고 알아차렸다.
“장차 밥 하는 집이 따로 있고, 세탁소가 있고, 아기를 키워주는 곳이 따로 있고, 부부가 문패를 따로 달고 그런 때가 온다.”
그 당시는 그게 믿을 수 없어 과장된 말로 알았다.
대종사는 붓글씨를 쓰실 때도 그냥 꾹 찍어서 쓰시지 붓을 곱게 다듬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백로지를 내서 써주셨다.
갈산동 집에서 총부로 잠실 작업을 하러 왔다. 공동작업이었는데 당시는 출가만 공동작업 을 한 게 아니라 재가도 그렇게 함께 일을 했다.
그럼 대종사께서 “응, 왔냐!” “응, 왔구먼” 하고 반겨주셨다. 대종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음성이 크셨다. 그리고 안광이 부셔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성경은 원기 14년부터 5년 동안 총부에서 3개월 동·하선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모든 과정을 따라하게 되었다. 강연과 회화 등 어렵고 힘든 선 생활에도 즐겁고 신나게 참여하였다. 대종사님이 나들이 하실 때면 따라 다니면서 훈증을 받았다. 하루는 대종사께서 알봉 너머에 있던 황등호수로 가실 때 따라 나섰다. 단장을 짚고 서 있던 대종사께서 넌지시 말씀하셨다.
“호수물이 참 맑고 좋지.” “네.” 성경은 대종사 말씀에 연하여 한 감상이 들어 여쭈었다. “종사님, 저 호수도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서 되었겠지요?” “그렇지.” “저희도 미력하지만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저렇게 호수를 이루듯, 마음공부를 하고 또 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아무렴. 그렇지.”
성경은 며칠 후에 있었던 강연 시간에 이 날 감상을 첫 머리로 들어 실마리를 풀어갔다. 강연을 듣고 있던 대종사께서 기쁜 표정을 지으시며 “성경이 참 잘한다”고 칭찬하니 그 말씀에 도리어 긴장이 되어 부끄러워하다 말끝도 제대로 못 마쳤는데 “2갑이다”하고 감정해 주신 일도 있다.
강연시간이 되면 여자부는 대체로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를 모시고 지도를 받아 강단에 올라갔는데 막상 연마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치마꼬리만 비틀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그런 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법좌에 앉아 계시던 대종사께서 “잘한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대종사께서 어느 날 “성경이가 관복을 참고해서 법복 한번 만들어봐라”라고 했다. 성경은 말씀의 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대종사님 법복은 청색 비단에 검정 물을 들여서 해드렸다. 대종사는 보통 사람과 비교도 안될 만큼 체격이 커서 의복을 할 때 마치 이불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일은 성경이 가지고 있던 재주로 한 큰 보은 중 하나였다.

명타원(明陀圓) 민성경 종사는 …

● 1913년 4월 17일 충남 부여 출생
● 원기 14년 입교
● 법랍 77년
● 정식 출가위
● 원기 91년(2006) 종사 서훈
● 원기 100년(2015) 10월 25일 열반

명타원 민성경 종사는 1913년 4월 17일에 충남 부여에서 부친 민현식 선생과 모친 이현귀화 여사의 1남 1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명타원 종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조용하고 명민하며 행실이 근면 성실하였다. 15세에 직산 송봉환 정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결혼 후 시모인 영타원 이대교 정사의 연원으로 원기 14년 지금의 세탁부에서 대종사님을 친견하였다. 명타원 종사는 대종사께서 친히 내려 주신 법명을 받들고, 그 날 이후 한결같이 그 때 그 마음으로 공부하고 공사에 정성껏 협력하며 살았다. 원기 14년부터 5년 동안 총부에서 동·하선 정기훈련을 대종사 법하에서 빠짐없이 동참하여 일생의 공부 기반을 잡았으며, ‘세상에 제일 행복자도 나요, 제일 행복한 때가 지금’이라며 기쁨과 희열심으로 살았다. 명타원 종사는 41세 시 부군과 사별하고 6남매를 교육하는 부모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 없어, 가정에서 바느질로 부업을 쉴 새 없이 하였고, 그 가운데도 꿋꿋한 의지와 불타는 서원일념으로 오직 대종사 법하에서 훈련받은 기쁨으로 생활해 왔다. 또한  6남매 중 1남 3녀를 출가 서원자로 올곧게 교육 성장시켰다.
명타원 종사는 “이 법대로 살며 공부하면 성불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이 법대로 살며 공부하면 어리석을 사람이 드물며, 이 법대로 살며 공부하면 공사가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평생 이 마음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명타원 종사는 명석한 지혜와 후덕한 덕망으로 주위 많은 인연들의 심복지인이 되었으며, 어떤 어려운 일에도 인과를 의심치 않는 마음으로 감수불보하는 원만한 처사를 한 스승이었다. 명타원 종사는 딸 셋을 전무출신시켜 “적당히 하려면 아예 짐 싸가지고 오너라, 내가 할란다”하시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전무출신의 본분에 전심전력하도록 특별한 후원과 권장으로 살피고 지켜 주었다. 명타원 종사의 공부는 정식 출가위, 사업은 준특등, 원성적 정1등으로 원기 91년 7월 제152회 임시수위단회에서는 법위를 정식 출가위로 사정하고 그의 공덕을 기리며 종사의 법훈을 서훈하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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