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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엄마 말대로 했더라면 2022년05월호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된다면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버틸 힘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

글. 조현호

엄마가 쌩쌩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를 나에게 집어 던졌다. 한없이 온화하던 엄마가 내가 학교를 안 간다는 지독한 투정을 계속해 서 부리니 참다못해 손에 잡히는 것 중 가장 가까이 있던 선풍기를 던진 것이다.
나의 사춘기는 남들보다 일찍 찾아 왔다. 항상 부족한 집안 살림이지만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기꺼이 해주었고 부족함이란 것을 모르게 키워 주셨다. 하지만 이런 엄마의 사랑은 반항심이 가득한 초등학생의 사춘기로 돌아왔다. 학원 땡땡이 는 기본이고 동생에게 분풀이하며 공부는 손을 놓아버렸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엄마를 고생시키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직후 잘 나가던 사업이 고꾸라져 가정에 많은 시간과 돈을 쏟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엄마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인생을 살아내셨다. 아버지의 불안정한 수입으로는 가정을 유지 하기 어려웠는지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간호 조무사로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셨다.
40살이 넘어서는 간호대학교에 진학 하여 일을 병행하며 전액 장학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 자격증을 끝내 취득하셨다.
항상 불안정하고 필사적인 삶을 살아 왔기에 엄마는 자식이 자신보다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인생을 살아가길 간절히 원했다. 하루하루가 불안한 고통스러운 삶을 물려줄 수 없기에 자식들을 위해 더욱더 희생하고 헌신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막연한 현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고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투정 부리고 짜증내며 엄마의 애를 타게 했다.
어렸을 적 ‘엄마 말대로 했더라면’, 안되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더라면 그 힘든 시절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버틸 힘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자식에게 선풍기를 던지는 지경에 이르며 마음 찢어지는 죄책감을 주는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책임감에 짓눌리던 엄마의 어깨를 더 무겁게 만든 게 마음속 깊은 곳 후회로 남겨져 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었다. 엄마의 대가 없는 사랑 덕분에 사춘기를 잘 이겨냈고 현재는 네덜란드에 있는 대학교를 우수 장학생으로 졸업한 후 외교관이라는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다. 엄마 또한 끝없이 발전해 나갔다. 최근에 쉰이 넘은 엄마가 독학해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고 현재는 수간호사와 간호학원 강사 일을 겸직하며 바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를 먹었다고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건 아니다. 아직도 가끔 짜증을 내고 툴툴거리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듣는 척이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엄마 말대로 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은 엄마의 어깨를 무겁게 하지 않기 위해서.


허리 똑바로 펴라

큰 고통은
자연히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글. 김용섭

엄마는 항상 말했다. “앉을 때 구부정 하게 앉지 마라.” 엄마는 자주 말했다. “불 끄고 휴대폰 보면 눈 나빠진다.” 엄마는 줄곧 말했다. “팔자걸음 걸으면 골반 틀어진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없을 때 엄마는 자주 잔소리하곤 했다. 그리고 많은 청년들이 그렇듯 흘려들었다.
 이십 대 후반이 되기까지, 내게 다가오는 가족들의 영향력은 차츰 변했다. 부모님 말씀이 절대적이던 유년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틈틈이 말 안 듣던 학창 시절까지 지나고 나니 순식간에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조언이 조언으로 들리지 않는 순간들이 많았다. 홀로 뭐든지 할 수 있고 내 판단이 옳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보통은 그랬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했고, ‘세대 차이’라는 말로 포장된 명목들은 가족들 의 관심과 우려를 간섭으로만 여기도록 했다. 나는 나대로 산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취업을 한 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따뜻한 물을 맞으며 샤워를 하다, 별 생각 없이 한 재채기에 허리가 나갔다. 바로 느낌이 왔다. ‘아, 이거 잘못 움직이면 큰일 나겠다’ 아슬아슬하게 출근은 했지만, 도저히 근무를 유지하면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곧장 병원에 들렀다. 사진을 찍고 진단을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아뿔싸… 본격적인 고통이 찾아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던 의사 선생님은 ‘급성 허리디스크’ 진단을 내렸다. 진통제를 맞고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기어가듯 집에 도착했다.
 연차를 내고 꼬박 이틀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슬프게도, 이게 첫 직장에서의 첫 연차 사용이었다. 급성 진단을 받았지만, 영영 침대 생활을 할까봐 겁이 났다.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소화도 잘 안 되는 이 기분을 평생 느껴야 하는 건가. 멀쩡하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두려워하며 휴일을 보냈다.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났다. ‘허리 똑바로 펴라.’
 다행히 며칠이 지나니 통증이 사라졌고 일상생활 회복이 가능했다. 예전에는 건강에 대한 다짐을 하면서도 몸이 회복되는 순간 잊어버렸지만, 이번 고통은 다른 경우였다. 종종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는 습관을 기른다. 큰 고통은 자연히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병상에 누워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이제는 가끔 생각한다. 엄마 말대로 할 걸. 엄마 말을 듣자. 경험을 일러주시잖니.



엄마 말 좀 들어라

나는 “엄마 말에 확신할 수 있는
엄마가 되자!”라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글. 박정순

사실 원고 주제를 받았을 때, ‘뭔가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없었을까?’하며 내 반평생의 인생을 곰곰이 돌이켜 보았다.
엄마 말대로 하지 않아서 내 인생에서 잘못되었거나 혹은 잘된 게 있었던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히 엄마 말에 반하는 행동을 했거나 그대로 따랐던 기억이 없다.
즉, 엄마는 나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라고 나의 인생에 특별히 관여를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온전히 나를 믿어서(?) 였겠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가 마치 ‘중학생 때는 오락실이나 노래방을 가면 깡패가 될 거야.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영화관이라도 갈라치면 그건 날라리들이나 가는 거야. 대학 때는 배낭여행이라도 갈라치면 특히 여자는 어디론가 납치되어 장기가 없어져서 나타난다니 언감생심 무슨… (70년대 생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라는 지극히 소심하고 모범적인, 일탈이라곤 거의 없는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아왔다. 왜 그랬을까?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엄마 말에 반하여, 찐하게 연애도 해보고, 무작정 일탈 여행도 떠나보고, 새로운 일에 도전도 해보지 못했을까 살짝 후회되는 것은 지금 삶이 평탄해서 누리는 사치라고 위안해 본다.
어느덧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지금, why not?!
나는 매일같이 새로운 세대와 소위 꼰대 세대들과 얽혀 지내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또 집에서는 어떠한가.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처음이다 보니 하루하루가 도전이다.
내 딸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 나와 똑같이 돌이켜 보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딸의 인생에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너는 나와는 달리 엄마 말대로 도전적인 삶을 살아라~!”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 말에 확신할 수 있는 엄마가 되자!”라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그렇지만, 현실은 “내 딸아~ 숙제는 다 했니? 책상 위는 치웠니? 양치는 했니?”이다.
“딸아, 엄마 말 좀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