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한 백미에 새겨진
70년 나이테

배는 든든히, 정은 풍요롭게, 정미소

취재. 장성문 객원기자

낡은 나무벽과 함석지붕의 건물이 길가에 덩그러니 서있다. 입구에 걸려있는 목간판과 그 옆의 ‘장날은 쉰다’는 표지판에는 ‘열락처(연락처)’가 적혀있다. 오래된 목조 건물에서 오는 세월의 고즈넉함이 온몸에 스며든다.
이곳은 경북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 위치한 가상정미소. 정미소가 하나둘 사라지는 시대에 긴 세월을 견디며 호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0년 된 마을 수호수 옆에 선 정미소는 수호수보다 더 힘겨워 보이지만 여전히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

‘끼-익’. 도착 연락을 하자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나무문. 가상정미소 사장 박정재 씨(75세)다. “들어오이소.” 박 씨가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말한다. 정문이 열려 망정이지 정미소 안은 무척이나 어둡다. 나무벽 틈새로 내리쬐는 빛줄기가 전부. 어둠에 적응되자 20~30평 공간에 웅크린 기계들과 바닥에 쌓인 나락 껍질들이 눈에 들어온다.
정미 기계들은 거대하다. 고개를 쳐들어야 다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나무로 된 게 흡사 사찰의 목탑같다. 나락을 바닥에 쏟으면 이를 높이 퍼올리는 5m는 됨직한 기둥 모양의 승강기, 승강기와 연결되어 왕겨와 싸레기를 거르고 현미를 뱉는 현미기, 현미를 보관하였다가 뽀얀 백미로 만드는 정미기와 연마기, 그리고 기계와 벨트로 연결된 경차 크기의 엔진 등이다. “벼가 여기 들어감마(가면) 여기 퍼올려가 저 통으로 들어갑니다. 현미 나락 다 까지고 덜 된 것은 다시 또 들어가고 이 통으로 들어감마(가면) 백미된다 매끈매끈 살(쌀) 나오지요.” 여기서 이 모든 복잡한 작업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놀랍다.

켜켜이 쌓인 먼지와 겨만큼이나 가상정미소가 보낸 세월은 두텁다. 가상정미소가 처음 설립된 건 1940년대. 경산에서 커다란 정미소를 운영하던 박 씨의 집안이 영천으로 이사오면서 이곳을 인수하였고, 박 씨가 물려받은 건 50년 전 일이다. “70년 넘었어요. 우리 위에 다른 사람이 하나 있고, 우리 어른들이 받아서 하고, 또 내 군대 갔다와서 스물 다섯부터 도맡았지요.”
가상정미소의 역사는 곧 박 씨의 역사다. 처음에는 손으로 돌리는 20마력 발동기가 다였으나 30년 전쯤 대우 트럭 엔진을 들이고 지금의 기계들도 일일이 설치했다. 어느 해에는 초가지붕에 불이 나 함석으로 교체했다. 매번 기계들이 고장날 때에도 박 씨는 혼자서 다 헤쳐왔다.

그 옛날 정미소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마을마다 하나씩 꼭 있었던 정미소는 그 마을 먹거리를 책임졌다. 가상정미소도 한 때는 하루에 80kg 쌀이 100가마니씩 나왔다. 여기에 보리도 찧고 밀도 빻았으니 그야말로 동네의 먹는 일이 모두 정미소에 달렸었다. “예전에는 아주 바빴지요. 일거리가 쌓여서 밤낮없이 기계가 돌았지. 쉴 틈이 없었슴더. 그 무거운 걸 하루에 수백 번 들었다 내렸다 해도 아픈 곳 하나 없었어요.”
그런 정미소가 요즘엔 보기 참 힘들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가정용 도정기가 속속 도입되고 자동화된 대형 기계들을 갖춘 미곡종합처리장이 생겨난 까닭이다. 예전에는 자기 마을 정미소에서 도정한다는 암묵적 원칙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게 서서히, 이곳의 일도 줄기 시작했다. “한 10년 넘었지요. 한 번에 줄은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씩 줄었어요. 요새 누가 살 찧으러 여까지 오겠능교.”

그렇게 밀 기계도, 보리 기계도 내놓고, 지금은 박 씨가 직접 수확한 벼를 도정할 때가 아니면 기계 돌릴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쌀 찧으러 오는 사람보다 낡은 정미소에 새겨진 세월이 입소문을 탔다. 가상리 일대에 진행된 미술마을 프로젝트 덕분에 명소가 된 까닭이다.
“그래도 정미소 하면서 익힌 기술로 주변 사람들 뭐 고장나면 고쳐주고 살도 해주고 한 거 생각하면 보람차지요. 정미소에는 살이 많으니까 어렸을 적 살밥 귀할 때도 우리 가족들은 돈은 없어도 먹을 걱정 없이 잘 살았어요. 그래도 정미소 살이 맛있다 아입니까.”
민족의 명절 추석을 맞아 정미소가 왁자지껄이다. “사장님 저 왔슴더~” “어허 내부터 왔다 아입니까.” “조금들 기다리쇼!” 한 뭉텅이의 나락을 실은 지게들이 줄을 서있고 기계는 굉음을 울리며 매끈한 백미를 토한다. 그 사이 사람들은 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웃음과 정이 풍요로운 그 옛날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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