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청보리밭에
가보셨나요!

취재. 노태형 편집인

1. 바다가 허락해야 드나들 수 있답니다.
으르렁 으르렁, 파도가 심술을 부리면 배들은 일제히 꼬리를 내린 강아지마냥 항구에 멈춰 서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냅니다. 하루 이틀 사흘…. 다행히 바다가 숨을 고르며 출항을 허락합니다.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나 봅니다. 그래도 배들은 기우뚱 기우뚱, 산을 넘듯 파도 사이를 넘실거리며 조심스러워합니다. 겨우 겨우 마음 졸이며 당도한 곳, 제주도에 딸린 ‘섬 속의 섬’ 가파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청보리가 가장 먼저 피어나는 곳이죠. 그 흔한 산도 언덕도 하나 없어, 바다와 어깨동무하고 선 해발 20m의 보리밭이 바람을 따라 출렁입니다.

2. 청보리가 흔들리자 마음도 따라 흔들립니다. 아련한 추억이 길 잃은 나그네처럼 다가섭니다. 
“얼굴에 버짐이 이래 많이 폈냐. 보리 싹 좀 끊어 와야겠다.”
손자 얼굴을 수심 가득하게 바라보던 할머니가 집 뒤 언덕으로 향합니다.
“보리 싹 끊어서 뭐하시게요?”
“그걸 찧어서 바르면 얼굴이 예뻐진단다.”
보리 싹을 한 줌 끊은 할머니는 그걸 두 손으로 비비며 기도하듯 흥얼거립니다.
“신령님, 신령님, 우리 손자 예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구멍 숭숭 뚫린 돌담 사이로 할머니의 지난 시절 주문이 맴맴 돕니다.
어린 형에, 그보다 어린 동생이 보리밭을 따라 걷습니다.
“우리, 보리피리 불어볼까?”
“그거 재밌겠다, 형. 어떻게 하는 데?”
호기심 가득한 동생에게 형은 보릿대를 짤막하게 잘라 입에 물려줍니다.
“자~ 봐봐? 이렇게 입술에 물고 힘껏 부는 거야.”
‘삐이~ 삐이익~, 삘리리~ 삐리리~.’
어린 동생도 힘껏 보리피리를 불어보지만, ‘푸욱~, 푸욱~’ 바람 빠지는 소리만 가득 흔들릴 뿐입니다. 꾀 많은 동생은 바로 방법을 바꿉니다. 보리피리를 물고 입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멋있게 분다고 우기는 거죠. 지금도 보리밭에는 허기진 배를 안고서 깡충깡충 뛰어 지나가는 어린 형과 동생의 추억이 바람을 타고 달려갑니다.
풋사랑은 늘 배가 고픕니다. 그만큼 그립기 때문입니다. 보리밭에 서면 누구나 하나쯤 간직한 어린 시절 풋사랑 이야기가 삐죽 고개를 내밀죠.

3. 청보리밭에서 만난 바람이 말을 걸어옵니다.
“요즘 얼굴이 많이 찌들었네.”
“산다는 건 큰 짐을 지고 걷는 거잖아. 아, 무거워.”
“너무 가지려고 하지 마. 욕심 때문에 힘든 거야. 진짜 욕심쟁이는 욕심을 다 비운대. 그래야 천지를 소유할 수 있거든.”
잠시 뜸을 들인 바람이 무거운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입니다.
‘사람들에게 언제 가장 행복했냐고 물으면, 가난했지만 마음 나누던 시절이 제일 행복했대. 그러면서 정작 가난이 오면 피하려 애써. 또 권력을 가지지 못했을 때가 가장 홀가분했다면서 막상 권력이 떠날까 두려워하지. 직위와 명예가 없을 때 가장 자유로웠다면서 그 명예가 사라질까 걱정하면서 살잖아. 참 인간들은 이율배반적인 행태로 행복을 찾아. 그러면, 행복 다 날아간다~.’
가파도 청보리밭에서 떠버리 바람을 만나 또 잠시 짐을 벗습니다. 버리면서 채워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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