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가진 것을 보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을 보는 지혜

정수경(아가다) 자오나학교 교장수녀

취재. 장지해 편집장

20대 초, 불현듯 갖게 된 인생 첫 목표가 ‘수녀가 되어야겠어.’였다. 하지만 그는 사범대학 졸업 후 교육대학원에 진학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근무했다. 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삶은 자꾸만 ‘교육’을 향해 흘러갔다. 정작 본인은 원하지 않는 길이었다. 그러다 수녀가 되고 깨달았다. ‘하느님이 나에게 이 역할을 맡기시려고 그 경험과 단련을 하게 하셨구나.’
세상에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소중한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그 큰 용기와 결심들은 때로, 여러 시선에 의해 상처로 돌아온다. 만약 그 주인공이 임신과 출산으로 학업을 중단한 청소녀(여성 청소년을 칭하는 말) 양육모라면 더욱 그렇다.
“한 명 한 명의 삶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돼요. 단순히 스쳐가는 한 사람이 아닌, ‘나와 연결된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인식을 변화해갈 수 있어요.” 청소녀들의 용기와 결심을 지지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에 힘을 실어주는 정수경(아가다) 자오나학교 교장수녀(이하 정 수녀, 원죄없으신 마리아 교육선교 수녀회)의 말이다.
스스로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에게 자오나학교를 통해 만나는 청소녀들은 새로운 세계이자 공부거리다. 하지만 그는 정작 아이들과 함께 사는 풍경을 ‘교육, 양육, 자립을 통해…’와 같은 거창한 표현으로 전하지 않는다. “함께 밥 먹고, 수업하고, 아이 잘 돌보라고 잔소리하며, 일상의 삶을 산다.”는 소박한 말에, ‘편견 없이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 진하게 전해진다.

● 자오나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자오나학교는 청소녀 양육미혼모와 학교 밖 청소녀들을 위한 기숙형 대안학교예요. 14~24세의 청소녀 중 아이를 양육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싶은 친구나, 여러 위기환경에 노출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죠. 무엇보다 본인의 삶의 의지를 가장 중요하게 봐요.”

자오나학교를 설립·운영하는 원죄없으신 마리아 교육선교 수녀회는 1986년 한국에 처음 들어온 이후 어린이집·유치원 등을 통해 주로 활동해왔다. 그러다 2012년 청소녀 미혼모를 위한 무료교육시설 준비를 시작해 2014년 10월에 자오나학교를 개교했다. 이곳에서 학교 밖 청소녀들은 약 2년 정도 머물며 검정고시와 직업훈련공부, 그리고 자립 준비를 한다. 청소녀 미혼모의 경우 임신 중이면 낙태 수술을 하지 않는 것, 출산했으면 아이를 키우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입학 원칙이다.

● 시설 또는 센터가 아니라 ‘학교’라는 게 특이합니다.
“저희 수녀회는 예방교육을 중요 모토로 삼고, 죄에 빠지기 전에 미리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오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설립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청소녀 미혼모가 되었다는 건 이미 멀리 가버린 것’이라는 관점도 있었죠. 우리 수녀회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영역의 교육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자오나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수녀님들께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하고 우리가 돌봐야 할 사람들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보자고 했고,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학습권과 교육수도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학교’가 되었어요.”

●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텐데요.
“교육은 자기가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어요. 지식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사실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잖아요. 하지만 정작 상대방이 내 인격을 존중해주지 않을 때가 많고, 그럴 때 내가 드러나요. 나의 인내심과 한계심과 반응하는 방식들이요. 그렇게 보면 우리 아이들은 늘 저를 시험하는 존재죠.(웃음)”

사람들은 아이들이 이곳에서 번듯하고 모범적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정 수녀는 ‘그건 어른들의 욕심’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후에 아이들이 ‘밥 먹고 잠자는 걱정 없이 안전한 곳에서 누군가와 어울려 살았고, 그곳에서 많은 지지와 도움을 받았구나.’ 정도만 떠올려줘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철이 들고 변화한 아이들의 모습은 당연히 큰 보람이다.

● 최근 낙태죄 폐지, 낙태합법화 등이 이슈입니다.
“일단 저는 가톨릭 신자니까,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인권을 생각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물론 현실적 잣대가 되니까 법 제정도 중요하죠. 하지만 ‘몇 주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에만 관심이 쏠리다 보니,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논의들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원하지 않는 임신이 여성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으려면, 남성의 책임이나 아이를 낳았을 때 생기는 경제적 또는 돌봄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안이 함께 논의되어야 해요. 생명의 본질은 정말 소중하고, 유일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잖아요. 말을 할 수 없고 자기 생각을 대변할 수 없는 그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뭘까에 대한 고민이 함께 필요해요. ‘무조건 다 낳아서 키웁시다.’라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여성과 아이 모두 편하고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자는 거죠. 12주, 14주 등의 기준은 본질을 피해가는 이야기예요.”

사실 그는 학교입학 상담을 해오는 연령층이 점점 더 낮아짐을 실감하고 있다. 아이들이 성(性)을 오락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으로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조심하면서 잘 즐기면 돼.’라는 어른들의 인식 때문이라고도 일침을 더했다. 소중하고, 존중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고, 서로 아끼기 때문에 나누는 것이라는 교육이 함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을 청소녀 미혼모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요?
“어떤 통계에서 24살 미만 청소년 미혼모 수가 약 2천 명에 가깝다는 사실을 접하고 굉장히 놀랐어요. 모두 어딘가에 살고는 있을 텐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청소녀 미혼모들은 삶을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게 힘들기도 하고, 미래 준비를 굉장히 힘든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 발자국을 못 내딛죠. 하지만 꼭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뭔가를 시도하면 생각지 않았던 경험을 해보게 되고, 삶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리기도 하거든요. 저희처럼 도와줄 수 있는 곳에 용기를 가지고 와주면 더 좋죠. ‘아이를 내가 키워보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이미 굉장한 힘을 가진 사람이에요.”

● 종교는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공생(共生)하는 법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는데 영향을 미친 사람들도 있고, 프랑스에서도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자기가 믿는 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믿음’은 매우 좋고 필요하기도 한데, ‘그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을 헤쳐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어요. 종교라면, 아니 종교 여부를 떠나서, 가장 중요한 건 공존하고 있는 존재들, 사람들, 환경들, 동식물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인 것 같아요. 교조적 믿음에만 치우쳐서 성경에 나오는 글자에 얽매였던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했거든요. 원리원칙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자유로워지고 공생하며 살 수 있을까를 잘 해석해내는 게 종교의 중요한 역할 같아요.”

● 신앙인 또는 종교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도 많습니다.
“종교생활이 취미나 사회적 신분유지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신앙과 나의 일상을 어떻게 통합시킬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야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신앙인들에게 평생의 과제죠. 미사에 한 시간 참여했어도,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돌변한 삶을 살면 미사에 참여한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하느님을 욕보이는 것이 되죠. 그럴 거면 굳이 성당에 갈 필요도 없고요. ‘우리 종교로 오세요.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삶에서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서 ‘저 사람이 성당 다닌다더니(어떤 종교를 믿는다더니) 뭔가 좀 다르네?’라는 말을 들으면, 성공한 신앙인이죠.”

● 삶의 이정표로 삼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되새기는 말은 긴데, 핵심은 이거예요. ‘너의 길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해주신다.’ 제가 선생님 안하고 수녀원 갈 거라고 그렇게 아등바등 했는데, 당신의 계획이 있으니까 원하시는 대로 돌리고 돌리며 이끄셨잖아요. 자오나학교를 꾸려가는 것도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거라고 믿고 맡기니까 필요한 순간순간에 ‘도와드릴까요?’ 하고 연락 주는 분들이 생기는 거죠. 제 힘만으로는 절대 못해요.”

● 행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장 기본은, 남이 가진 것을 보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을 보는 거예요. ‘나에게 저게 있어야 행복한데.’라면서 채우려고 하니까 힘들죠. 적당히 포기하면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충분히 행복해요. 그리고 또 하나, 저는 요즘 ‘내가 세상에 와서 무엇을 가꾸고 키워낼 수 있을까?’와 ‘내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해요. 물론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이 가꾸고 돌보는 일이긴 하지만, ‘살아가면서 함부로 소비하지 않고 가꾸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거기에 뭔가 보람과 행복이 있겠다.’ 싶은 거죠. 돈을 주고 뭔가를 쉽게는 사도 내가 직접 생산해내진 못하더라고요. 소비는 환경문제와도 연결되잖아요. ‘생산할 수 없으면 소비를 줄여라.’가 요즘 새로운 화두예요.”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