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펄에서
어린 목선을
만나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어린 목선 한 척 개펄에 누웠습니다.
“자냐? 자냐? …”
몇 번을 불렀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수상합니다. ‘푸~~.’ 한숨을 토해내고는 자리를 비킵니다. 잡아둔다고 멈출 세월이 아니란 걸 경험으로 아는 거죠. 그렇게 어린 목선의 반항은 침묵으로 시작됩니다.
어둠이 검은 진펄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새들도 산으로 떠났습니다.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달랑게와 콩게가 굴 밖으로 동그란 눈을 내밀며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덩달아 망둑어도 미끄럼을 타듯 개펄을 헤집고 다니죠. 갯조개도 느릿느릿 마실 나서듯 집을 옮깁니다. 행여 어린 목선이 잠에서 깼을까 흔들어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하늘과 땅이 온통 새까맣게 변한 칠흑 같은 시간이 내려앉습니다. 비로소 어린 목선이 꿈쩍꿈쩍 눈을 깜박입니다. 그 속내를 모를 리 없습니다. 펄밭에 깊이 박은 발을 하나씩 빼낼 때마다 왜 그리 천둥이 울리는지요. 가슴을 철렁이며 조금씩 바다로 나아갑니다. 가만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 둘 셋…. 누구나 다 그 시절엔 그러했으니까요. 잡는다고 잡히는 세월이 아니잖아요?

어린 목선의 첫 항해는 호기롭습니다. 
섬과 섬 사이를 헤엄쳐 무인도에 닿기도 하고, 까마득히 쏟아지는 총총 별들을 이불 삼아 밤바다를 떠돌기도 합니다. 간혹 졸음을 이기지 못해 바위섬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지만 이깟 정강이 한 번 깨졌다고 어찌 대수로울까요.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는데, 왜 그 질척질척한 개펄에 갇혀 살아야 하냐고!’
그래서 개펄은 또 억울합니다.
‘쓸모없는 땅’이라고 인식되어 업신여겨지고, ‘배들의 무덤’처럼 여겨져 기피당하고, ‘대지를 정화’하는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양새 때문에 오히려 서러움이 많죠. 무수한 생명을 잉태하는 땅이 오히려 무수한 생명을 삼키는 땅으로 오해받고 살았으니 말이죠. 누천년 간 무수한 생명들이 펄 속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이가 드뭅니다.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섬에서 뭍으로 나가려는데, 안개가 짙게 깔려 한 치 앞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은 날이었다고 합니다. “항구가 그리 멀지 않기에 직선으로 달리면 금방일 거라 생각해 무리하게 항해를 시작했죠. 그런데 한참을 달려도 항구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주위를 살펴봤더니,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거죠. 얼마나 무섭던지.” 이건, 다행일까요? 무서운 걸까요?
다시, 어린 목선이야기로 돌아가려 합니다.
어린 목선의 긴 항해는 많은 사연을 남깁니다. 거친 풍랑을 만나 뒤집힐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잃을 뻔한 순간도 겪었죠. 인정사정없는 큰 배에 떠밀린 좌초의 위기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살면서 어찌 풍랑 없는 세월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지쳐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안개 낀 바다 위를 상처투성이 배 한 척이 기우뚱 기우뚱 항구로 들어서는 모습이 꿈길을 타고 아련히 펼쳐집니다. 그리고 비몽사몽, 어린 목선은 본래 그가 누웠던 그 개펄에서 다시 눈을 떴습니다. 안도의 긴 숨~. 비로소 어린 목선의 귓가로 개펄을 고향 삼아 바삐 움직이는 무수한 생명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들죠.

코로나19로 한 해가 멈추어 선 듯한데, 어느새 또 한 해가 흘러갑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잃은 것도 많겠지만, 배운 것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 ‘사는 데에는, 꼭 많은 걸 필요로 하는 건 아니더라.’는 것이죠.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생은 일장춘몽이라는데요. 하루살이로 살지는 마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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