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종교 위기는,
세상으로 나오라는 초대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

취재. 장지해 편집장

코로나19 재난 상황 속에서, 종교들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은 역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종교인가?’를 자문하게 한다.
“예배의 자유 이전에 우리에게는 사랑의 의무가 있어요. 지금은 모이는 것이 오히려 사랑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죠. 사회와 함께 같은 고통을 더 적극적으로 나누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부끄러움과 반성도 있어야 해요.” 평신도 신학자이자 종교대화학자인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은 섭외요청 때부터 ‘개신교가 반성할 게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개신교만의 과제던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종교에 대해 높아진 불신은, 오래된 종교위기론을 더욱 압축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토록 변화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에 대해, 종교라면, 종교인이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 원장은 지금의 상황에서 종교들에게 쏟아지는 질문과 지탄과 외면을, 종교에 대한 위협이 아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라는 초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그가 걷고 있는 ‘새길’은, 개신교는 물론이고 모든 종교들이 처음 시작했던 그 길이다.

● ‘새길’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개신교는 본래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정신에서 시작되었는데, 굉장히 빨리 재성직화 됐어요. ‘그런 성직자 중심의 교회풍토를 벗어나서 평신도들이 성직자로서의 역할까지 하며 교회를 만들어 가보자.’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게 ‘새길’이죠. 저희가 가고자 하는 새길은 새로운 교회로 나아가는 길이면서, 한편으로는 근원으로, 교회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해요. 그 길을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과 함께 걸으려고 노력하고요.”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근간이 되는 새길교회는 1987년 3월에 창립됐다. 이곳은 기존 교회들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교회 건물이 없는 것이고(예배는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드린다), 또 하나는 ‘종교’하면 대변되는 성직자(목사)가 없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예배는 물론이고, 교회의 모든 활동을 나누어 담당한다.

● 평신도들로 운영되는 교회가 정말 있다니, 신기합니다.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가치를 다시 한번 공유하자는 면에서는 맞는 방향 같아요. 다만 관건은 그 가치가 어떻게 실천되는가이죠. 자유는 누리지만, 건물과 교단 그리고 성직자가 없어서 힘든 점도 있거든요. 그 안에서 서로 돌보고, 가르치고, 배우고, 사귀고, 연대하고 봉사하려면, 말 그대로 ‘주체적인 개인’들이 되어야 해요. 앞으로는 평신도교회든 제도교회든, 평신도들이 스스로 사제로서의 자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어려울 거예요. 요점은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가치가 제대로 살아나는 거죠.”

코로나19로 대면 예배가 중단되면서 새길교회는 현재 음원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비대면 예배’ 하면 영상을 떠올리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화면을 보면서 앉아있는 예배가 아닌 음원예배를 더 선호해서다. 그리고 교인들은 각자 최적의 예배 시간을 스스로 결정한다. 산책을 하면서도, 운전을 하면서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면에서 고정되었던 기존의 예배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는 것이다.

● 코로나19는 종교에게도 많은 변화와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번 코로나19는 예배 형태의 위기, 신앙의 위기 같은 교회의 내적 위기보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 위기’를 더 본질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요. 재난 상황 속에서 ‘종교가 사회적 책임성과 공공성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의심이 깊어진 거죠. ‘교회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반성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죄송하다는 말만으로는 신뢰 회복이 어려울 거예요. 삶으로 보여줘야죠. 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여기에 그는 교회 내 여러 코로나19 담론들에 대한 일침을 더했다. 사람들의 생활과 생명, 안전 등의 위기에 대한 공감적이고 참여적인 담론보다는, ‘어떻게 하면 언택트 시대에 예배를 유지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인가.’와 같은 담론이 주를 이룬다는 것. 교회 또는 개신교에게만 한한 이야기가 아님에 뜨끔하다.

● 사실 많은 종교들이 정규 종교행사 중단으로 인한 두려움을 갖게 됐는데요.
“저는 종교인, 특히 성직자들에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매주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흔들릴 신앙이라면, 그건 이미 약한 신앙이었던 거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심지어 교회에 일 년을 못 가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는 게 중요하잖아요. 한 명 한 명이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원불교인으로 가정과 일터와 마을에서 살아가게 하는 지혜와 신앙의 가치를 공유한다면, 이 기간은 오히려 신앙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어요.”

● ‘사회적 영성’이란 뭔가요?
“사회적 영성은, 이론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까워요. 이 말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사회’가 없어졌기 때문이죠. 더불어 살아가는 경험, 즉 사회가 해체된 상황이기 때문에 다시 사회적인 게 필요해진 거예요. 사회적 영성의 가치는 ‘고통의 감수성’과 ‘연대’예요. 고통의 감수성은 관계적 영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건 지금 코로나19가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죠. 고통 받고 있는 저 사람이 나와 절대 무관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연대는 참여적 영성이라고도 하는데, 교회 안에만 머무는 영성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고통에 참여하는 영성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대구 의료인들의 모습을 사회적 행위라고 하는데, 자기를 넘어서서 이웃에게 다가가고 이웃과 운명을 함께 하는 그 사회적 행위가 사실은 가장 종교적이고 영적인 거죠. 저는 그걸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보여주셨다고 생각해요. 대각 후에 불법연구회를 먼저 만들지 않고 협동조합 운동부터 하셨잖아요.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은 불이(不二)의 관계예요.”

● 세상을 위한 종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겸손해야 할 것 같아요. 전통사회와 달리, 현대사회는 기본적으로 삶의 영역이 굉장히 다원화되고 다양화되었잖아요. 치료와 방역 등과 같이 종교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겸손히 인정하고, 그러한 영역의 주도권을 존중하면서 협력하고 따라가야죠. 두 번째는 역시 공공성이에요.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시민의 상식과 도덕보다 신앙인의 상식과 도덕이 더 낮다는 거예요. 좋은 시민으로서 좋은 신앙인이 보여야 할 공공성을 지금 팬데믹 상황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해요. 다른 영역은 그 영역의 주체들에게 맡기고, 대신 종교는 종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야죠.”

기본적으로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마음을 탐구해왔다. 그러기에 그는 코로나19 장기화 속에서 필요성이 높아진 ‘심리방역’이나 ‘마음방역’ 영역에서의 종교 역할을 강조한다.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마음을 위한 지혜와 수행을 제공하는 일이 종교가 지금 할 일이라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간 대화와 협력도 중요할 텐데요.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많이 필요하죠. 종교들마다의 다름이 저에게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에요. 각자 나름의 구원과 해방의 길을 가다 막힐 때,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찾게 도와줄 수 있잖아요. 대화의 방식을 저희 선생님께서는 ‘건너갔다 돌아오기’라고 하셨는데, 이게 순례랑 비슷해요. 순례를 가면 은혜롭고 좋지만 그렇다고 계속 거기 머물러 살지 않잖아요. 반드시 내 자리로 돌아오고, 변화된 자아로 돌아오죠. 종교 간 대화도 그래요. 건너갈 때는 내 것을 놓고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변화된 자아로 돌아와 더 좋은 그리스도인, 더 좋은 원불교인이 되어야죠. 저는 이웃종교인들과 같이 수행하고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세상을 등지는 기도가 아닌 세상의 고통을 등에 지는 기도를 할 때 유독 기쁘더라고요. 고통 받는 자에 대한 감수성이 대화의 출발점이면 좋겠어요.”

● 탈종교화시대에 종교인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종교가 종교만을 위한 언어에서 벗어나서 여러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해요. 가장 가깝게는 이웃 종교의 언어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종교의 핵심을 가장 비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죠. 사실 저에게 두 가지 욕망이 있는데, 하나는 교황님처럼 종교적 복음의 언어로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이생에는 포기했고(웃음), 대신 제 가슴에 중심으로 붙들고 있는 복음을 가장 비종교적으로, ‘예수’라는 이름이나 교리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나도 쓰지 않아도 그 이야기와 글에서 예수가 느껴지고 예수가 꿈꾸었던 세계가 보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요. 종교인들이 모두 자기 실험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경전에 있는 언어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각자가 따르는 성자들의 가르침을 표현해 낼 수 있으면, 탈제도종교시대에도 종교의 자리는 여전히 유효할 거예요.”

● 평소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잘랄루딘 루미의 ‘너의 어둠이 너의 등불’이라는 시구를 좋아해요. 저는 제 삶이 말을 못 따라가는 것이 늘 부끄럽고, 몸이 하나라서 고통의 모든 현장에 직접 가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해요. 어둠이 나의 등불이라면, 제가 겪고 있는 불안, 두려움, 부끄러움, 고통이 저를 변화시키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이 시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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