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와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글. 김정탁

지난 호에 언급된 <도덕경> 2장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爲美) 것을 우리도 아름답다고 아는(知美) 것에 대해 추하다는 평가이다. 또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爲善) 것을 우리도 좋다고 아는(知善) 것에 대해 좋지 않다는 평가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美)과 좋음(善)은 추함(醜)과 나쁨(惡)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아름다움과 좋음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거나 좋다고 ‘여기는(爲)’ 것을 우리도 아름다움과 좋음으로 ‘알기에(知)’ 노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둘째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거나 좋다고 여기는 것을 우리도 그렇게 아는 것에 대해 이것이 어째서 바람직하지 않은지의 근거를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우주자연 및 세상만물의 이치에서 비롯되는데 구체적으로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 생겨나고, 어려움(難)과 쉬움(易)이 서로 이루어지고, 긺(長)과 짧음(短)이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高)과 낮음(下)이 서로 기울어지고, 인위적인 소리 음(音)과 자연적인 소리 성(聲)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前)과 뒤(後)가 서로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이런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성인(聖人)의 모습이 소개된다. 성인의 이런 모습은 우주자연 및 세상만물의 이치라는 천도(天道)에 따라 인도(人道)를 구현하는 일이다. 앞서 <도덕경>을 전반적으로 소개할 때 동아시아 사상의 특징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동아시아 사상은 크게 천도(天道), 인도(人道), 치도(治道)로 구성되는데 천도는 서양의 자연과학, 인도는 인문과학, 치도는 사회과학과 각각 비교된다. 그런데 서양의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은 서로 연관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천도, 인도, 치도는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천도에 입각해서 인도와 치도가 전개되므로 인도와 치도의 뿌리는 천도에 있다.

<도덕경> 2장 내용은 천도에 입각해 있는 인도를 소개하는데 이를 성인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處無爲之事)’, ‘말없는 행동으로 가르침을 행하는(行不言之敎)’ 일이다. 무위는 흔히 아는 것처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고자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자 함이 있는’ 유위(有爲)와 비교된다. 성인은 어째서 무위로 일을 처리할까? 그것은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 생겨나고, 어려움(難)과 쉬움(易)이 서로 이루어지고, 긺(長)과 짧음(短)이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高)과 낮음(低)이 서로 기울어지고, 인위적인 소리 음(音)과 자연적인 소리 성(聲)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前)과 뒤(後)가 서로 따르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위(有爲)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유(有)와 무(無), 어려움(難)과 쉬움(易), 긺(長)과 짧음(短) 등을 구분해 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유위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연결되어서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이를 구분하여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있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와 무, 어려움과 쉬움, 긺과 짧음 등을 구분할 뿐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주자연 및 세상만물의 이치를 우리보다 더 알지 못하는 부류들이 있다. 노자에 따르면 그 부류 중 하나가 유가(儒家)이다. 유가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인위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이에 입각해서 인도(人道)를 구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자에 따르면 인의예지도 자연스러워야지 인위적이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위예지가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의예지일 뿐이다. 이 경우 형식이 실질을 지배하는, 즉 인의예지를 위한 인의예지가 고착되게 마련이다. 

성인은 무위로 일을 처리하기에 가르침도 말 없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말 없는’ 행동이 아니라 ‘말 있는’ 행동으로 가르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또한 유가이다.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때때로 이를 익힌다는 데서 이런 사실이 잘 나타난다. 배우거나 가르치려면 반드시 ‘말’이 매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 자체는 유위적인 성격을 지닌다. 말이란 표현하는 ‘실제’가 반영된 게 아니라 사람들끼리의 ‘약속’에 의해 성립된 기제이기 때문이다. 표음문자는 표의문자에 비해 특히 그러하다. 따라서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유위를 행하는 일이다.

<도덕경> 2장 마지막은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행동으로 가르침을 행하는 성인의 모습을 성인이 만물을 어떻게 다루느냐를 통해 보여준다. 먼저 만물을 자라나게 해도 성인은 이를 자랑하지 않고, 또 만물이 생겨나도 이를 소유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만물을 이루어도 이에 기대지 않는다. 이는 만물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따라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인데 첫째 자랑하지 않고, 둘째 소유하지 않고, 셋째 기대지 않음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공을 이루어도 공에 머물지 않는 태도이다. 이 글은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었기에 문장을 풀어서 보여주면 이해가 쉬어진다.

한 가지 재미난 표현이 있다. 성인은 단지 공에 ‘머물지 아니함(不居)’으로써 그 공이 성인에게서 ‘떠나지 않는다(不去).’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에 성인은 그 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 ‘머물지 않다(不居).’와 ‘떠나지 않다(不去).’는 그 의미와 관련해서 겉으론 대립적이다. 머문다는 의미의 ‘거(居)’와 지나간다는 의미의 ‘거(去)’가 서로 반대적인 의미를 지녀서이다. 그럼에도 실질적으론 내용이 같다. 즉 머물지 아니해서(不居) 떠나지 않는다(不去)는 게 의미상 서로 통해서이다. 게다가 ‘머물다’의 ‘거(居)’와 ‘떠나다’의 ‘거(去)’가 발음상 같다는 것도 우리들의 흥미를 더한다.

끝으로 성인은 성스러운(聖) 사람으로 예수, 석가, 공자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노자와 공자는 물론이고, 노자와 장자 사이에도 성인관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노자와 공자에게 있어 성인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공자는 성인을 군자로 일반화한다. 그래서 성스럽거나 하는 어떤 특정한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그를 군자(君子)라고 부른다. 이런 군자가 곧 유가에서 일컫는 성인이다.

노자는 공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서 성인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공과 관련해선 성인보다 신인(神人) 쪽에 무게를 둔다. 장자는 <소요유>에서 성인을 무명(無名), 신인을 무공(無功), 지인(至人)을 무기(無己)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성인은 세상에 이름(名)을 내세우는 걸 피하고, 신인은 세상에 공(功)이 드러나는 걸 꺼리고, 지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걸 피한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장자의 입장에선 신인에 가깝다. 그렇지만 성인, 신인, 지인이 모두 통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자와 장자에게서 드러나는 성인관 내지 신인관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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