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願)’

글. 장진영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교무

우리가 평소 몸에 익힌 것은 습관이 되고, 의식까지 물든 것은 업력이 된다. 즉 업력(業力)은 이전의 경계에 대한 몸의 습관적 반응이 의식화된 업식(業識)에 보존된 잠재적 힘이다. ‘업식’은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에서 무명(無明)과 행(行)에 이어서 나오는 식(識)에 해당한다. 대승의 유식에서는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뜻한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업(業)이 없으면 윤회와 재생도 없고, 그에 따른 고통도 없다. 업(業)은 어근이 ‘√k’으로 ‘짓다, 행위하다, 형성하다, 구성하다, 실행하다. 성취하다, 낳다, 나타나다, 보이다, 조직하다, 경작하다’ 등을 뜻하며, 명사형인 ‘kamma(빠알리어)’ 혹은 ‘karma(산스크리트어)’는 ‘행위, 작업, 작용, 직업, 구성, 조직, 실행, 성취, 결과, 의식, 행위의 직접목적’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의 모든 행위는 곧 업이며,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은 바로 그 업의 과보다.
한 마디로 업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정)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관없이) ‘의도적 행위’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의도적 행위는 ‘행(行, sakhra; 산스크리트어 saskara)’을 말하는데, 행은 ‘sa(함께)’과 ‘√k(행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크게는 의도적으로 조작된(作爲) 모든 현상들을 말한다. 작게는 의지(의도)를 포함한 모든 행위를 뜻한다. 행이 업의 동의어로 사용될 경우는 주로 후자의 의미를 따른 것이다. 12지연기설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일어난다고 할 때, 행은 업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구체적으로 12지연기설에서 행을 유발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무명(無明)→행’의 과정, 둘째, ‘촉(觸)→행’의 과정, 셋째, ‘애(愛)→행’의 과정이다. 먼저 ‘무명→행’의 과정을 보면, 무명은 행에 영향을 미친다. 무명이 우세하면 대부분의 행위는 악하다. 하지만 무명은 행의 전제가 될 뿐, 행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들은 선할 수도 있다. 선업(선한 의도를 가진 행위)의 공덕과 지혜(통찰)는 무명을 타파할 수 있다.
다음으로 ‘촉(觸)→행’의 과정은 12지연기설에 따라 촉(觸)→수(受)→애(愛)로 나아가는 과정, 특히 수에서 애로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서 촉(觸)은 실제 마음이 작용할 때 항상 함께하는 마음의 상태인 ‘변행심소(遍行心所)’로서, ‘수(受), 상(想), 사(思)’ 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촉과 수가 행업을 일으키는 ‘사(思)’나 ‘애(愛)로 나가는 경로’를 미리 차단해야 한다. 아예 외부의 경계(外境)와 접촉(觸)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행업을 줄일 수 있다.
마지막은 ‘애(愛)→취(取)’ 등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정서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인 갈애를 끊음으로써 애(愛)의 행업의 축적인 ‘취(取)’를 감소시킨다. 그러므로 그 해결방법(수행방법)에 있어서도 12지연기설의 개별 단계에서 가능한 행(업)의 발생을 제어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평소에 좋은 의도와 선한 의지를 갖는 게 중요하다. 이를 통해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게 된다. 구체적인 실행에 앞서 의도나 의지가 선행되어야 하며, 의도와 의지가 일시적이거나 제한된 것이 되지 않으려면 큰 뜻과 큰 원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중생의 삶을 벗어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러한 고통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예로부터 불보살들은 모두 큰 원(誓願)을 세운 분들이다. 업력(業力)에 의해 12연기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원력(願力)을 통해 12연기를 굴리고 다니는 삶을 살아야겠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