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갔다 하지 말고
교당에서 밥을 먹어라.”

내가 전북여고(전주여고 전신) 2학년 때, 총부에 왔다가 일타원 박사시화님께 “전무출신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일타원님께서는 “네가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냈느냐.”며 크게 기뻐하셨다. 그리고 세탁부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나가려고 하자 불러들이시더니 “제권이가 전무출신 한답니다.” 하고 자랑하셨다.
이때 전무출신 하겠다고 하고서 나간 사람이 있었다. 내가 전주여고 12기인데, 8기인지 9기인지 한 선배가 전무출신을 하겠다고 했다가 하지 않고 그만두어 말들이 많았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성현께 약속하고 어찌 지키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그 선배의 어머니 해운옥 씨는 신심이 대단하여 딸이 전무출신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그 선배는 할 수 없이 전무출신 하겠다고 했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소태산 대종사님(이하 대종사님)께 “전무출신 못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대종사님께서 “몸과 마음을 대중에게 내놓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이제 와서 못 내놓겠다고 하면 어쩌느냐. 대중에게 물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여 야회 때 대중이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되었다.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는 쪽에 손을 든 사람이 많아서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중략)
일타원님께서 대종사님께 “전무출신 한다고 했다가 변절할까 봐 광고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씀드리니 대종사님께서는 “아니다. 자꾸 대중 앞에 공포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할 때 내가 대중 앞에 공포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챙기게 된다. 혼자만 마음먹고 있으면 혼자 살짝 나가버리는 수도 있게 된다. 지금은 한다고 하지만 더 크면 달라진다. 옳은 일에 정성을 바치고 하기로 한때는 천하에 알려야 한다. 천하에 알려서 신심 가지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대중이 모인 식당에서 “제권이가 뭣을 안다고 전무출신을 하겠다고 나한테 맹세했단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희색이 만연하시어 다락에서 사과도 꺼내 주시고 상(賞)도 줘야겠다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그리고 옳은 일을 하니 천하에 광고해야 한다고까지 하시며 대중에게 자랑하셨다. (중략)
내가 아버지께 졸업하고 불법연구회 공부하러 간다고 말씀드리니, 중은 되지 말라고 반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독신으로 성공하겠다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지만 중이 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미국 유학이라도 보내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대종사님의 법을 깨치기 전에는 유학도 안 갈란다.”라고 했더니 크게 화를 내셨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나의 조카는 “할아버지께서 고모가 유학 가지 않는다고 하니 유리가 올려진 책상을 치시면서 크게 화를 내셨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당시 총부에는 외학풍이 불어 상당한 시비가 있었다. 일타원님께서는 아무래도 대종사님께 여쭈어보아야겠다고 하시고 대종사님 계시는 조실로 가셨다. “제권이 아버지가 제권이를 대학에 보내준다고 하는데 본인은 가지 않고 총부의 학원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왜 안 가려고 하느냐? 아버지가 보내 준다고 하면 공부하고 오라고 하라.” 외학을 매우 반대하셨던 대종사님께서 나에게는 “아버지가 유학까지 보내준다고 하면 공부 다 하고 와도 된다.”고 하셨다. 나를 그만큼 믿어주셨다. (중략)
나의 뜻과는 달리 집에서도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하셨고, 대종사님께서도 “너희 아버지가 대학 공부를 시켜 준다고 하시니 공부를 마치고 오라.”고 하시어 대학을 알아보고 숙명여자전문학교를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가정과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주일마다 교당에 가서 법회를 보았다. 그러나 절대로 교당에서 점심이나 저녁밥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공중 밥을 먹으면 빚이 지고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기 28년(1943) 4월, 대종사님께서 서울에 오셨다고 하기에 서울교당에 갔다. 오전에 법회를 보고, 집에 가서 점심 먹고 오후에 또 와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니 대종사님께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교당에서 밥을 먹어라.”고 하셨다.
대종사님 진짓상에 올린 파란 미나리나물이 지금도 생각난다. 대종사님 말씀이라 교당에서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데 무슨 예감이었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가 대종사님을 뵌 마지막이었다. 내가 뵌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열반하셨으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어찌나 융통성이 없었는지 학교에 결석하면 큰일이나 나는 줄 알고 열반 소식을 듣고도 바로 가지 못하였다. (중략)
온 법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법을 설하시던 대종사님, 대종사님을 뵈면 모든 사심 잡념이 녹아났다. 내가 전무출신 하겠다고 했을 때 상을 주고 싶다고 하시며 벽장에서 과일을 꺼내 주셨던 대종사님, 공부를 더 하고 오라고 하시어 더 뵙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곤타원 박제권 종사는 …
● 1925년 6월 7일 일본 동경 출생
● 원기 32년(1947) 4월 출가
● 동산선원·전주교당·이리교당 교무 / 이리·일본교구장
    수위단원 역임
● 정식 출가위
● 법랍 49년
● 원기 73년(1988) 대봉도 법훈 서훈
● 원기 76년(1991) 종사 법훈 서훈
● 원기 100년(2015) 3월 8일 열반

곤타원 박제권 종사는 1925년 6월 7일 일본국 동경에서 당시 일본 대학에 유학 중이던 부친 영산 박영식 정사와 모친 적타원 정봉숙 정사의 3남매 중 셋째로 출생하였다.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의 유족한 명문 집안에서 자란 곤타원 종사는 할머니 계타원 정형섭 정사가 원기 20년 일타원 박사시화 대봉도의 연원으로 원불교에 입교한 후, 원기 23년 4월 일타원 대봉도의 안내로 대종사를 뵙고 ‘제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원기 32년 유일학림에서 수학한 곤타원 종사는 교무부 서기로 시작하여 서울교당 순교무를 거쳐 동산선원·전주교당 교무, 감찰원 감찰처장, 이리교구장 등을 거쳐 일본교구장으로 재직하였다.
곤타원 종사는 일찍부터 일본교화에 뜻을 세웠다. 숙명여자전문학교에 다닐 때 정원 40명 중 절반이 일본인이었는데 그 친구들과 서신 교류를 하며 장차 일본교화의 터전을 닦았다. 이후 종교자 대표회의 등 몇 차례 일본을 내왕하며 고베, 요꼬하마 등의 인연지를 찾아 영사관과 재일 거류민단 등을 방문하여 새 인연을 찾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틈틈이 교리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비록 일본교화가 어렵더라도 그 인연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본 땅에 일원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원기 71년 2월 신타원 박삼순 교무와 함께 일본 관동교당으로 떠났던 곤타원 종사는 문서교화와 한글 교실 운영으로 일본에 교화의 뿌리를 내렸다.
누구에게나 편하고 인정이 많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곤타원 종사는 “교역자의 사회 참여는 불의와 맞서 싸우는 용기가 필요하고 또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정을 나누어야 하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도 용서하고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공도에 헌신해 왔다. 새 회상 창업 초기에 신학문을 수용한 신여성으로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국내교화는 물론 일본교화에 정열을 다 바친 출가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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