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차 향을 담다

정진협 다구 장인

취재. 김아영 기자

“86년도에 녹차를 처음 접했는데, 입안이 참 깨끗했어요. 그때 ‘이게 차 맛’이라는 걸 알았죠.” 차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가 찻잔을 든다. 그 차 맛을 잊지 못해, 차에 어울리는 도구를 하나둘 만들기 시작했다는 정진협 다구 장인(장유목공예). 그 세월이 벌써 30년이다.
“잘 우린 차는 고소하고 달아요.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도 하죠.” 처음으로 나무 찻잔을 깎고, 받침을 만들고, 식힘 사발을 만들었다. 또 찻숟가락과 차를 보관하는 보관함, 찻상까지…. 자신이 만든 다구로 맛있는 차가 우러날 때 자부심을 느꼈다는 그.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젊었을 때나 그랬지,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겸손하게 웃어 보인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커피처럼, 사람들이 차를 편하게 생각하고 간편하게 마시면 좋겠다는데…. 그의 다구들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있다.

“기능이 없는 것 같지만 다 기능을 생각하고 만든 거예요. 예를 들면 바닥에 놓인 이 차받침은 손으로 집을 때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도록 높이를 맞추고 안정감 있게 디자인했죠.” 다관도 마찬가지. 물을 따를 때 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곡선의 각도를 생각해서 마무리 했다.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쓰기 편한 기능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행착오가 많았죠. 지금도 나무의 속성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많은 돈을 들여 건조장을 지었음에도 나무들은 그의 맘도 모르고 뒤틀리기가 다반사였다. 건조를 한 후에도 상온에서 나무를 오랫동안 적응시켜서 써야 했던 것이다. 크기가 작은 차 도구들이라도, 잔과 뚜껑의 합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거나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작은 흠결이라도 있으면 바로 창고행이었다. 그렇게 쌓아놓은 것만 해도 몇 상자라며 그가 웃는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만드는 유명한 곳에는 다구세트를 몇만 개씩 만들어 납품했어요. 차인(茶人)들이 제 다구세트가 사용하기 편하고 아름답다고 할 때가 최고로 좋았죠.” 내가 사용해도 좋은 것, 바로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정직한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나도 그걸 이용해 차를 마셔야 하니까요.”란 단순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만든 다구들이 세월을 머금어 더욱 윤이 난다.

“힘들 때도 많았죠. 2010년에는 은퇴를 한번 했어요. 하하.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안 되겠더라고요.” 여행을 다니고 취미생활도 가져봤지만, 눈을 뜨면 ‘오늘 뭐하지?’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5년 만에 공방을 다시 연 그에겐, 새롭게 만들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자개로 화려함을 더하고, 기본틀은 전통을 따라가되 편리함을 더했다. 삼베작업을 해서 붉게 칠한 다반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나무로 만들어진 다구세트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도 머릿속에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남들을 따라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여든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아직도 새로운 걸 만들고 싶다는 그. 지금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차를 흥미로워하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다기도 계획 중이라는데…. 그가 “녹차를 우릴 때 뜨거운 물은 떫은 맛을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식힘 사발에서 80℃ 정도로 식힌 후 녹차를 우려요. 그 과정을 사람들이 조금 편하고 흥미롭게 여길 수 있는 다기를 만들고 싶어요.”라며 눈을 반짝인다.

“앞으로의 계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다구를 만드는 거예요. 이 일을 쉴 때 너무 심심했거든요. 하하.”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었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하지만, ‘정직’을 우선순위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다구를 만들어 온 그. “물푸레나무는 오래될수록 무늬가 좋아진다.”는 말처럼, 그가 만든 다구에는 은은한 녹차 향과 함께 오랜 세월 쌓아 온 연륜과 정성이 진하게 묻어난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