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에 눈을 뜨다

글. 김서연

법회 후 “마음공부 잘합시다.”라고 마무리 인사를 할 때마다 머뭇거렸습니다. ‘나는 마음공부의 체를 못 잡았는데 어떻게 공부하는 게 마음공부일까?’ 긴 시간을 운전하면서 법문을 들을 때면 알 것 같은데 차에서 내리면 잊어버리고, 교전을 보면 알 것 같은데 덮으면 모르는 답답한 날들을 보내는 저와는 다르게, 교도님들은 공부를 훌륭하게 해내시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매장에 작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케이크를 사간 중년여성 고객이 초와 칼, 폭죽이 든 봉투가 제대로 붙지 않아 떨어진 걸 모르고 그냥 가신 걸 알게 되었습니다. “케이크는 특별한 날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일부러 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초·칼 봉투가 없는 걸 도착해서 알게 되면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하시겠냐. 내가 만약 그 고객이면 속상함을 지인에게 다 말할 것 같다. 그러면 매장은 얼마나 손해냐. 테이프를 두 군데 야무지게 붙여라.”라고 말하고는 정리 정돈 부분까지 폭풍 지적을 했습니다.
십 여분의 시간이 지나도 요란한 마음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 고객이 전화 주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점심시간에 들은 법문이 떠올랐습니다. 원기 101년 원불교 청년정기훈련에서 경산 종사님께서 해주신 ‘심고’에 대한 법문인데, 따라 해보자 싶었습니다. “천지하감지위! 부모하감지위! 동포응감지위! 법률응감지위! 은혜로운 법신불 사은님, 원기 105년 1월 28일 문현교당 김서연 부민점 파리바게트 매장에서 고객님께 초·칼 봉투를 드리지 못해 고객님 마음을 불편하게 함을 사죄드립니다. 연락이 오면 사과의 말씀과 더불어 얼른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잘 챙기겠습니다.” 심고를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평소에는 잘 하더니 오늘은 실수를 했구나. 다음엔 더 잘하자.” 하고는 다른 매장으로 이동을 하는데, 처음으로 해 본 심고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공부의 시작이 이거구나!’ 다시 교당에 나왔건만 삼 년 동안 맴돌기만 하던 일원상의 진리, 신앙과 수행, 교리도, 게송까지 한꺼번에 정리되는 환희를 맛보았습니다.
큰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얘기로 강연을 하려고 하는데, 유치원 졸업하고 초등학교 입학하는 것 같아.”라고 하니 아이가 “원불교에 그런 게 있어? 교회는 집사, 권사가 있던 데 어떤 단계야?”라고 묻기에 “내가 스스로 정했어. 보통급부터 여섯 등급이 있는데, 사실 보통급은 아무나 다 되거든. 거기에도 급이 있다면 나는 최저 1등급이었다가 스스로 2등급이라고 하는 거지.”라고 했더니 큰아이가 “축하합니다.”라고 해줘서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이제 저도 법회 후에 큰 소리로 “마음공부 잘합시다.”라고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아, 넌 계획이 있구나

글. 이현선

“엄마는 방도 없으면서!”
요즘 중학생이 되는 아들과 자주 부딪히는데, 사춘기 아들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아들은 저 한마디가 얼마나 내 자존감을 무너뜨렸는지 알고 있을까?
얼마 전 딸이 장난스럽게 “엄마 방은 부엌”이라고 했을 때도 하하하 웃으며 넘겼건만 이렇게 아들이 못을 박아주니 내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지 눈물이 난다.
우리집은 방이 세 개다. 아들 방, 딸 방, 그리고 안방은 남편 방이 된 지 오래고 나는 거실과 주방이 주 생활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엄마는 방도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결혼 후 내 주체가 없어지고 당연히 가족이 우선시 되어왔던 지난 13년을 돌아보았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먼저였던 적이 있었나? 마트에 가서 장을 봐도 무거운 물건들은 모두 내가 들었고, 어디 앉아야 할 일이 있을 때에도 가족들을 다 앉히고 나서야 내 자리를 찾았고, 자리가 없으면 없는 대로 서 있기도 했다. 그게 왠지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엄마가 된 이후로 늘 그렇게 살았다. 비타민도, 몸에 좋은 음식도, 나는 당연히 내가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먹였다. ‘불편해도 내가 불편한 게 낫지. 남편이 편한 게 낫지. 아이들이 편한 게 낫지.’ 하고 살았는데 어두운 내면에는 설움이 쌓였던 것일까?
당연히 자식과 남편을 위해 헌신했던 내가 이제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제 바닥난 내 자존감을 스스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뒷전 취급하지 않겠다. 스스로 불편함이 당연히 내 몫이라 하지 않겠다.
다짐을 해 본다.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내 인생 이제 시작이고 원하는 거 다 이루고 살 거야. 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제일 애틋하니까.”
나도 이렇게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리라. 아마도 아들은 이런 엄마를 정신 차리게 해주려고 ‘방도 없이 이제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을 건넨 게 아닌가 싶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도 나를 성장 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아들아~. 넌 계획이 있구나! 엄마를 변화시킬 계획~!”


입교와 은혜의 역사

글. 김영진

어느 날 전주에서 여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불교가 뭐 하는 곳인지 동생이 오면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얼마 후 응암동 조카네 집에서 아기 돌잔치를 하고 난 후 동생에게 물었다. “야, 원불교가 뭐 하는 데야?” 그러자 동생이 말한다. “응 언니. 불교 부처님은 할아버지고,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님은 아버지시어요.” “그래?” 동생은 “할아버지보다 아버지가 더 친근감이 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소태산 대종사님 법문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래서 응암동에서 흑석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각지교당(현 서울교당)에 들러서 선생님(교무님을 옛날에는 선생님이라 함)을 뵙고 입교했다. 그때 입교비가 3천 원이었는데 동생이 그 돈을 냈다. 내가 집에 와서 동생에게 입교비를 주니 동생은 안 받는다고 한다. 내가 “딴 돈 같으면 안 줘도 되지만 이 돈은 내가 입교한 돈이니 네가 받아야 해.”라고 하니, 동생은 “그럼 받아야지.”라고 말했다.
그 후 삼각지교당을 다녔다. 설법이 너무 좋아서 수많은 날, 슬프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교당을 하루 같이 다니다 보니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마다 법신불 사은님이 늘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신 은혜가 정말 감사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집의 연통 배출기가 고장이 났다. 그 후 남편이 전기선을 세 가닥인데 두 가닥으로 이어 놓은 것이 불로 이어졌다. 나는 그날 오후 5시경에 신경성으로 밥도 못 해 먹고 간신히 밖에 나와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개가 다 부러웠다. “너는 나보다 낫다. 온 사방 다 마음대로 다니니 참 좋겠다.” 하며 동네 아줌마들과 모두 모여 놀다가, 저녁 하러 들어갔다가 그냥 방으로 향했다. 그 시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쨍쨍하였는데,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천둥 번개가 치며 잠시 잠깐 소나기가 내린 후 멀쩡하게 그쳤다.
그날 밤 무심히 잠을 자고 그다음 날까지 몸이 아파 힘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힘없이 굴뚝을 쳐다보았다. 지난밤 잠깐 비가 오는 시간에 불이 활활 타던 굴뚝에 비가 쏟아지며 굴뚝이 그대로 헐어 내려 찢어져 있었다. 그날 법신불전에 감사 감사하다고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그다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와 우리에게보다 더 감사했던 건, 그때 그 시간에 비를 안 주셨으면 그 동네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너무나 감사했다. 더구나 그 동네는 산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법신불 사은님! 그때 우리 모두를 크게 살려주셔서 지금 김영진이가 교당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자손들 늘 지켜주셔서 항상 감사하며, 소태산 대종사님 뜻에 잘 따르고 항상 조심조심하며 기도로서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엄마와 딸

글. 김진영

우리 엄마는 나와 같은 말띠이고, 나에겐 24살 차이 나는 친언니 같은 존재다.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30대에 접어든 내 나이만 애꿎게 생각했지 엄마가 벌써 50대 중반이 되셨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겐 단짝이자 편한 친언니 같은 존재임엔 변함이 없다. 우리는 누가 둘 다 말띠 아니랄까 봐 집순이와는 거리가 멀고 바람을 쐬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가끔 보는 친구들이나 남자친구보다, 매일 함께 있는 엄마와는 서울에서 해보지 못한 것들이 참 많았다. 평일 오후는 자기 계발 활동, 주말은 개인 약속 등으로 대부분 집 밖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익숙함에 속은 나의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휴식기에는 햇볕이 쨍쨍한 평일에 한가로운 낮부터 엄마와의 데이트를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TV에 나온 맛집 줄 서서 먹어보기, 자전거 타고 한강공원 가서 라면 먹기, 창고형 카페 가기 등 평범하고도 소소한 행복을 엄마와 함께했다. 나에겐 평범했던 일상이 엄마에게는 처음이고 색다른 경험이었는지 엄마는 즐거워하셨다. 나도 덕분에 뿌듯했고 앞으로 엄마와 서울 여행(?)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날씨도 좋고 운동도 좋아하는 우리는 2주 동안 왕복 3시간 정도 걸리는 한강 라이딩을 3번이나 하고 왔다. 출발할 때는 멀어서 막막했지만 도착할 때쯤 한강을 가로지르는 멋진 성수대교, 좌우에 보이는 롯데타워와 남산타워를 감상하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백번쯤은 한 것 같다. 게다가 운동 후 먹는 한강 라면은 꿀맛! 이제껏 먹었던 라면은 라면이 아니었다.
또, 최근에 우리 모녀는 먹방과 동시에 사진을 찍는 재미에 푹 빠졌다. 원래도 엄마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셨고, 푸드 플레이팅, 풍경 등을 감각 있게 잘 찍으셨는데 최근 인스타그램을 하시면서 더욱 재미가 생기신 것 같다. 엄마와 나는 둘이 갔던 맛집, 한강변 풍경의 사진을 인스타그램 피드와 스토리에 기록하고 계속해서 추억을 꺼내 보았다.
엄마와 나의 버킷리스트는 생각보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해보면 다 쉽고 간단하고, 결국엔 ‘함께’라서 더 좋았다. 앞으로도 나의 베스트 프렌드인 엄마와 함께 이번엔 뭘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하며 하나씩 해나갈 것이다. 하고 싶은 게 더 이상 없을 때까지!


한 사람의 서원

글. 성정덕

평소처럼 법회를 보다 무심코 옆을 보니 남편, 시어머니, 시동생이 같이 법회를 보고 있다. 순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한 사람의 간절했던 서원이 스쳐간다.
나의 외할머니는 만타원 김만행화이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셨는데, 우리 친정엄마가 맏이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원불교에 입교하셨는데,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가 싫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입교하는 날부터 큰 딸인 우리 엄마에게 교당에 다니기를 권유하셨지만 엄마는 ‘거기는 사이비 종교니, 심지어 사기를 치는 곳’이라는 등등의 말로 외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 큰 딸이 교당에 나오게 해 주세요.” 부산은 물론 경상도 일원에서 만타원의 서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자식 중 거의 전부가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교도가 되어 법호를 받았는데 오로지 큰 딸인 엄마만이 엇나가니 할머니의 서원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러길 40년, 결국 외할머니께서 열반하시는 그날까지도 엄마에게 원불교란 그저 사이비 종교로 치부되는 아주 미미한 종교였다.
1999년, 친정아버지가 열반하시고 일 년 쯤 지났을까? 엄마의 꿈에 외할머니가 나타났다. 외할머니의 “얘야! 이제 그만 원불교로 가라. 다른 곳은 다닐 만큼 다 다녀 보았잖니.”라는 말에 엄마는 “또 원불교 타령이야! 거기가면 뭐가 있길래 자꾸 가래?”라고 물었다. 외할머니는 “거기 가면 이 분이 계실거야.”라고 하며 사진을 꺼내 보여주다 바로 감추셨고, 엄마는 “그 사람이 누구야?”라고 외치다가 꿈에서 깼다고 한다. 그 길로 엄마는 인천교당에 가셨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교당에 다니신다.
결국 외할머니의 서원은 이루어졌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본받겠다며 언니와 형부에게 공을 들이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10년 공든 탑은 형부가 직장 때문에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음으로 무너졌다. 많이 속상해하시고 울기까지 하셨다.
외할머니의 ‘살아 40년 죽어 10년’의 서원과 그 영향을 받은 엄마의 서원은 나를 원불교에 다니게 했고, 나의 시부모님, 남편, 시동생에게까지 이어졌다.
남편은 “난 종교 생활 안한다. 다니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 너도 강요하지 마! 그리고 종교 생활은 하되 법회만 봐.”라고 하면서 내가 교당에 갈 때마다 “지난주에 갔는데 또 가? 뭘 그리 자주가!”라는 핀잔을 주던 사람이다. 시동생은 원불교에 관심은 있으나 교당에 나오거나 법회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내 옆에 앉아 같이 법회를 보고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가! 서원의 위력을 빌리지 않고서는 나와 내 가족들이 교당에 나오게 된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이 외할머니 서원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지금은 내 아이들이 원불교를 나오지 않지만, 외할머니의 서원에 동참하면 엄마가 그랬듯, 나와 내 가족들이 그랬듯, 내 아이들도 언젠가는 이 진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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