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처럼

글. 노태형 편집인

근대 이후, 전례 없는 혼돈의 시기가 도래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한 지금의 지구촌 상황은 사람 간의 거리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 나라와 공간의 모든 거리를 차단시키고 있다. 마치 발전기에 전기가 끊어짐으로 인해 요란하던 공장이 일순 멈춰 선 고요처럼…. 삶을 풍요롭게 했던 대공장의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사람들은 불안의 눈초리로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 물론 이 사태가 진정되면 모든 것은 빠르게 원상태로의 회복을 시도할 것이다.
우린, 이 기회에 잠시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를 포함)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인간의 잘못된 욕심이 세상을 망가트리지 않았는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이 생명을 황폐하게 하지 않았는지, 물질과 권력에 집착한 세계지도자들은 인간성 회복보다 물질세력을 등에 업고 세상을 지배하려고만 하지 않았는지 등. 그러다 보니 무수한 생명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혼란은 회오리바람처럼 걷잡을 수가 없는 게 필연이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의 역습에 덩달아 종교가의 운신 폭도 급격히 축소되었다. 종교의식이 장기간 정지되는 유례없는 상황의 발생과 더불어, 오히려 바이러스 확장자로 낙인찍히는 오점과 무력감을 남기게 되었다. 근래 ‘사회가 오히려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내듯, 종교인들의 탐욕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진리의 깨침에 뿌리를 두지 않은 종교인들의 오만과 독선이 사태를 키웠다고도 볼 수 있다. ‘종교는 비과학적이어도 괜찮은가?’ ‘종교는 원래 비합리적이었던가?’ ‘종교는 상식적이지 않아야 진리적인가?’ ‘종교는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릇된 종교관이 일제히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있다. 상식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진리적이지도,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신앙심은 혹세무민일 뿐이다.
그러기에 100여 년 전, 종교의 시대성·생활성·대중성에 맞춰 창교한 소태산의 안목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을 근거 삼고 진리에 바탕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개교의 동기로 강조해 준 소태산의 말씀은 지금 시대에 더욱 큰 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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