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빛으로 물든 날

글. 정인신

‘정읍 방문의 해’를 맞아 준비한 ‘내장산 겨울빛 축제’.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다워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잎이 지고 난 겨울은 때론 마른나무가 가지 위에 눈꽃을 피우기도 하고 산사의 바람소리가 스쳐 지나가는 고요한 숲속입니다.
텅 비어 충만함으로 그윽한 산길을 걸어가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나무들은 그 사이 봄을 준비하고 있지요. 계절의 변화는 설렘과 함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조용한 숲에 축제가 열렸습니다. 내장산 일주문을 통해 들어가는 산책길인 단풍터널이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빛들로 눈부신 밤을 선보였습니다.
초승달이 걸려있는 이 밤에 누가 왔을까 궁금했는데 가족과 함께, 연인끼리, 또 친구들일까요? 나는 도반과 함께, 가지가지 모양으로 불이 밝혀진 단풍터널을 지나 눈꽃정원 별빛 정원을 걸었습니다.
불빛 따라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내 그림자도 그곳에 어울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랜만에 그림자를 밟아보는 날이네요.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 나무에 걸어놓은 스피커를 통해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노래가 전인권의 목소리로 울려나왔습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 ….’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아픈 기억, 후회,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날들…. 깊은 울림으로 가슴 속에 들어와 눈물이 나는 것을 보니 나에게도 아픈 기억들이 쌓여있었나 봅니다. 이제 지나간 일이죠. 모두 내탓으로 돌려 훌훌 털어버리고 노래를 불러보자는 말에 공감하여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수 없이 많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나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투명한 등불에 써놓은 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며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별처럼 반짝이는 그대, 넌 충분히 반짝이고 있어, 조금은 흔들려도 괜찮아 어른이 되고 있는거야,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어… ….’

세상에 빛이 없다면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눈부신 빛의 무리도 사람이 만들면 어느 기간 설치했다가 거두면 사라지는 거지요. 그러나 햇살은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어느 기간도 없이 그냥 끝없이 존재하며 빛나기를 멈추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그 빛 속에 물들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오래전, 인도에 있는 브라마 쿠라리스 라자요가 명상센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되는 말은 ‘나는 영원한 존재다. 빛을 발하는 한 점 평화의 빛이다.’였습니다.
‘한 점 빛’이라는 말이 처음엔 생소하게 들렸지만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알아차리는 내안의 그 무엇, 그것이 한 점의 에너지이고 빛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수행자들은 그 빛을 찾아 수행처를 찾아가고 집중수행을 합니다. 누군가를 알려면 정보와 시간이 필요하듯, 자신을 알고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때로 일상의 일들을 내려놓고 신성한 본성을 깨달아 내 안의 빛을 밝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본성대로 피는 꽃처럼 자기 생명의 빛이 드러날 때 행복은 저절로 온다네요.

우주의 빛은 조각나지 않고 온전하기에 만물은 특성 따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고 이미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지요. 내 안에 감추어진 신성! 그 영롱한 빛으로 어둠을 밝히면 고통도 상처도 치유되고 누구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사랑이니까요.
봄인 듯 겨울인 듯, 두 계절이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가슴을 울렸던 그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오늘도 후회 없는 꿈을 꾸며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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