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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여성 교무, 변화를 말하다 2020년02월호

여성 교무,
변화를 말하다

● 변화를 맞이할 때가 됐다
    박유정 | 교무·대신교당
● 말과 행동으로 ‘실력’을 보여줘야
    오성 | 교무·천심회
● 세계 누가 봐도 멋진 교무
    강신오 | 교무·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 더 당당하고 더 자신있게
    안정은 | 교무·동영교당

변화를 맞이할 때가 됐다

어느 선진은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들은 아름다움에 취해 입에서는 탄성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다, 변화란 사람들의 마음에 탄성이 나오게 해야 한다.
현재 우리들은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일상은 변화 속에서 바쁘게 전진하고 있다. 우리 교단도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주로 외형적인 바뀜의 현상을 변화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의식의 흐름과 구조와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생활종교를 강조하고 있는 우리 교단은 지금껏 남자 교역자에 비해 여자 교역자에 대한 관례적인 규율 또는 규제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불합리한 관습적이고 관례적인 부분에서 탈피하려 하고, 더 합리적인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 가고 싶어 한다. 또 외적인 요소가 우리를 변화의 시점으로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그 요구의 가장 첫 지점에서 원불교 정녀제도의 변화를 수용했고, 이제 원불교의 상징처럼 느껴왔던 여자교무 정복도 변화를 맞이할 때가 됐다.
활동적인 청소년교화를 해야 하는 여성 부직자들은 학생들에게 조롱을 받기도 하고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한다. 대중교통 이용 시 치맛자락이 걸려 넘어질 뻔한, 실제로 넘어지기도 한 사연을 종종 들어왔다.
여성 교무들이 착용하고 있는 제복은 신분을 표시하는 확실한 매체가 돼왔다. 사회활동을 할 때 신분보장과 신변보호에 크게 기여하는 등 좋은 면도 많았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따라 불편함과 시대 착오적인 이미지로 비춰지기도 하고, 청소년들에게 이상한 옷차림으로 전달되는 등 좋지 않은 면들도 있다.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할 교화가 이로 인해 자칫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흐름으로 갈 수도 있다. 외부에서 청소년들과 만날 때면 다른 청소년의 눈치를 보는 학생도 있다. 활발하고도 폭넓은 교화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제약이 따른다면 실로 안타까울 수밖에.
지난해 정화단에서는 좀 더 활동적이고 폭넓은 교화를 할 수 있는 정복의 대안으로 양장 정장을 제안했다. 몇 가지 디자인을 총단회에서 선보이며 자발적 변화를 이끌어 왔다.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고, 호감 갖는 재가·출가 교도들이 많았다. 물론 우려의 소리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당대에 특별한 옷과 머리를 하면서 일반인들과의 다른 모습 하는 것을 크게 경계하셨다.
변화의 흐름에 우리가 함께 순항하자는 것은 좀 더 합리적이고 편리한 복장으로 활발하고 적극적인 교화의 선봉자가 되자는 것이다. 더하여 중요한 것은 성불제중 재생의세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의 교법정신을 시방세계에 전하고 모두가 진급하는 낙원세상으로 가기 위한 ‘본질’을 여의지 않고 능동적으로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최근 수위단회에서 여자 교역자 양장병용 시범기간을 갖자고 결의했다. 이런 기회가 재차 번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품위를 지키고 격에 맞는 복장을 착용함으로써, 교역자로서의 자존감을 높이며 성직에 최선을 다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말과 행동으로 ‘실력’을 보여줘야

교단 2세기를 힘차게 열어갈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 교역자 복장이 양장 병용 시범 실시 단계에 이르고 있고, 여성 교역자 결혼 선택이 각자의 뜻에 맡기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은 매우 희망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평등해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구속하거나 제약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평등하지 못한 처우와 제약은 밖으로 출산율 극감이라는 인구 절벽의 원인이 되었고, 안으로 여성 교역자의 감소로 나타나 교단은 빠르게 남성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양성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조화롭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최근 교단의 작은 변화가 여성이 가진 굴레와 구속을 풀어줌으로써 남녀 권리 동일로 향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 교역자 정복의 변화는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이다. 한복과 양장 병용 시범 실시 기간을 거치면서 활발한 공유와 소통 과정을 통해 더 좋은 제안들에 대한 논의로 발전되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양장 복제의 시범 운영이 단체복 의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기 때문에, 교역자의 정갈한 이미지와 품위가 지켜지며 교당 안팎의 교화 활동에 불편함이 없는 변화의 행보로 나아가야 한다.
한복이 가진 고풍스러움과 한복 정복이 주는 상징성은 교단 100년 역사에서 의미 있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띄는 복장에, 나는 길거리에서 교무님을 만나면 한 걸음에 뛰어가 인사를 드리곤 했다. 어린 시절 서울 길거리에서 교무님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기에 더욱 반가웠다. 우리 교당 교무님이 아니어도, 교무님이라면 누구나 나를 사랑해주는 따뜻하고 정겨운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검정 치마·흰 저고리에는 믿음, 정감, 추억, 신뢰, 존경, 헌신 등의 이미지가 담겼지만 개인의 개성과 특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던 시대에서 개인이 존중받아야 사회가 건강해지는 시대이다.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교단도 여성 교역자의 삶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의 바람인 양장 정복을 통해 개인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내어 활동력과 교화력으로 이어져야 할 때다. 그래야 개인도, 교단도 시대화·대중화의 행보에 함께 할 수 있다. 더불어 그동안에 스승님과 선배님들이 쌓아온 여성 교역자의 이미지를 이젠 실력으로 보여줘야 하는 책임이 더 주어졌다. 옷과 머리를 갖추었다고 알아주고 대우(?)를 해 주던 시대에서, 말과 행동으로 실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복장의 변화는 자기 관리라는 필수적 요소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한복은 모든 걸 품어 안음으로써 개인의 신체적 특징을 최소화하였다. 그러나 양장은 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내면의 수행력이 드러나므로, 신앙과 수행에 더 적공해야 한다.
예복은 경우와 장소에 맞도록 착용하라는 정산 종사님의 예전 의제의 법문을 떠올려 본다. 한복 정복과 양장 정복이 경우와 장소에 따라 빛을 발하며 교화에 활력을 불어 넣어, 변화의 주인공이 되고 활발한 행보로 교화의 신바람을 불리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세계 누가 봐도 멋진 교무

나는 멋있고 당당한 게 좋다.
공부를 해도 사업을 해도 멋있고 당당하게. 말과 행동이 다른 건 멋있지 않다.
누가 원불교와 불교와의 차이점을 물으면 나는 가장 쉽게 Reformed Buddhism, 새 불교라고 소개한다. 차별 없이 누구나 신앙하고 수행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일원의 교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자부심으로 살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다양한 종교의 성직자들과 일반 미국인들을 만나면서, 세계보편종교 원불교의 여성교무는 세계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논의하고, 개선해야 할 내용은 남녀 차별이다.
미국은 이민 국가이다. 다양성을 넘어 실제로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만큼 생존을 위한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인 ‘가족’을 중요시하고, ‘평등’에 민감하다. 남성교무들이 가정에 대한 선택권을 갖는 반면, 여성교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이 같은 사실이 일반 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차별로 다가와 원불교는 교리와 실제가 다른, 그야말로 ‘불평등한(unfair) 종교’가 된다.
외국인이 “안녕하세요.” 하면, 우리는 “한국말 잘하시네요.” 한다. 이런 비슷한 정서가 미국에도 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너 영어 못한다.”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옷도 해당한다. 여성교무 정복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예쁘다고 한다. 인사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실 친해진 후 다른 의견을 말하는 미국인들을 많이 보았다. 검은 히잡이나 차도르를 두르고 가는 여성과 정복을 입은 여성교무는 미국인들 눈에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카락이 머리를 파고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삭발을 하든지, 가발을 쓰든지, 아니면 매주 화학제품을 발라 머리카락을 펴야 한다. 그런 머리카락을 타고난 사람에게 현재의 여성교무 머리모양을 서원과 신심만으로 강요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머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작년에 정녀지원서가 드디어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감이 올랐다. ‘원래 원불교는 결혼에 대해 남녀차별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남·정녀 선택 시기가 달라졌다.’는 가난한 변명을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미주총부 출범을 앞두고 있는 시기와 아울러 중앙총부에서 여성교무의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목소리와 시도들이 들리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 옷을 입고 이 머리를 한다고 성직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 참 종교인으로 인정받는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는 종교라는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세상과 함께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변화하며 진화하고 있다. 세계 누가 봐도 멋있고 당당하지 않은가. 가슴이 설렌다.

더 당당하고 더 자신있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남녀권리동일’을 평등 세계의 방법으로 밝혀주셨다. 이는 그 당시 사회에서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기에 배움을 갈구하는 많은 여성들이 불법연구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오늘날 원불교학과 신입생 여학생 수는 점점 떨어져서, 이제는 한자리를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5년 전, 내가 원불교학과를 다니던 시절에 함께 입학했던 일곱 명의 여자 동기 중 네 명이 속세로 돌아갔다. 그 학생들은 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까? 인연이 다해서, 또는 본인의 업장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우리 교단에 남녀 불평등한 제도가 있지는 않은지 검토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스승님이나 선배님에게 “원불교의 제도는 남자와 여자가 불평등하다.”고 얘기하면, “네가 선택하지 않았니? 알고 들어온 것 아니야?”라고 반문을 받는다. 출발을 앞두고 A와 B 중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A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의 시작점이 과연 똑같다고 할 수 있을까?
청소년 교화를 하다보면 청소년들로부터 받게 되는 많은 질문 중 하나가 “왜 여자는 결혼하지 못하나요?”였다. “이제는 바뀌고 있어. 여자 교무도 결혼할 수 있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제는 여성 교무도 정녀 지원을 강요가 아닌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결혼을 하는 경우가 생겼을 때의 관련 법규를 제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논의할 때 늘 걸림돌이 생기는 이유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개개인들이 전무출신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도록 늘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선진님들께서 후진들을 믿지 못한다면, 또는 누가 들어도 평등하지 못한 제도라면, 원불교가 과연 이 사회에서 시대화·생활화·대중화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여성 교역자들에게는 제도의 문이 좁아졌다. 이 길에 들어오고 싶어도 불합리한 규정 때문에 못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후진이 없는 원불교에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여성 교역자의 양장 병용 시도에 출·재가 교도님들의 우려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양장 병용을 반기는 사람들 또한 많이 있다. 여성 교역자는 원불교의 상징물이 아니다. 양장 병용으로 원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이 파괴되는 것 또한 아니다. 그 이전에 여성 교역자 각자 각자가 행복하고 인권이 존중받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행복이 외부조건에 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젊은 여성 교역자들이 의복 때문에 교화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더 당당하고 자신 있게 교화하고 싶고 뛰고 싶은 후진들의 목소리를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변화하는 데에는 두려움과 용기가 따른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5만년 대운으로 나아가야 할 원불교가 불합리한 제도를 수정하고 보완해 나간다면 더 많은 대중들이 원불교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불교의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여성이 제도의 문에 들어올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