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음 없이
한 길로 매진하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정광훈은 17세 경에 영산학원에서 1기생으로 수학하게 되었다. 그의 출가의 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가 영산성지에서 태어났고, 모친과 부친은 소태산 대종사(이하 대종사)와 깊은 인연으로 만났으며, 부친을 비롯하여 누이 라선과 양선이 이미 전무출신 하였으므로 그의 출가의 길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영산학원에서 정산 종사, 주산 종사, 응산 종사 등의 지도를 받았는데 차츰 출가의 뜻이 굳어지자 하루는 대종사님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대종사님, 저도 이제부터는 전무출신 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느냐? 누가 권하더냐?” “따로이 권한 사람은 없습니다. 영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사람으로서 전무출신의 길이 가장 보람 있는 길일 것 같습니다. 저의 아버님과 두 누님께서 이미 전무출신을 하셨습니다. 저도 그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전무출신을 해서 특별히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가?” “네, 꼭 하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종사님과 여러 선진님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우리 회상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싶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갈 때에 거짓 없이 참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오직 참(眞)을 생명으로 하여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호! 그래, 우리 회상의 밑거름이 되는 것과 동시에 오직 참을 생명으로 진실되게 거짓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이지. 참 좋은 생각을 했구나. 광훈이는 솔직하고 순수하고 정열적인 성격이다. 그 두 가지 뜻하는 일을 꼭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옛 말씀에 ‘처음의 뜻을 그대로 가지고 노력하면 큰 도를 이룬다.’고 했다. 지금의 그 두 가지 뜻을 변치 말고 전무출신 잘해 보아라.”
대종사님의 승낙을 얻은 정광훈은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옛말에 한 사람이 출가하면 구족이 제도를 받는다고 하였는데, 우리 가족은 아버님을 비롯하여 누이와 나까지도 출가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나는 세세생생 대종사님의 제자로 우리 회상의 큰 일꾼이 되리라.’ 정광훈은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다. (중략)
원기 25년(1940)을 전후해서 전무출신들 중에는 한 때 외학병이 유행했다. 외학에 뜻을 두었던 몇몇 제자들은 대종사님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 정광훈도 역시 한 때 외학병으로 대종사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기도 했다. (중략)
총부 대중이 서대원을 지탄할 때, 정광훈은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정열적인 성격으로 서대원의 지탄에 앞장 섰다. 정광훈은 서대원의 멱살까지 잡고 그의 입산을 눈물로 만류했다. 그런데 서대원의 입산 사건이 있은지 얼마 후에 정광훈도 역시 입산해서 고경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초창기의 교단은 일이 많아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불경을 공부하려면 역시 깊은 산골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서대원 선생의 입산 사건이 있은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그때 나는 서대원 선생의 규탄에 앞장섰는데, 지금은 내가 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인간이란 이처럼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이 많은 것인가.’ 정광훈은 이런 고민과 갈등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산의 뜻을 밝혔다. 총부는 역시 발칵 뒤집혔다.
“아니, 원 세상에 그게 무슨 소리야! 정광훈으로 말하면 서대원의 멱살까지 잡았던 사람인데 이번에는 자기가 입산을 하겠다니, 세상에 그런 모순이 어디 있담!”
총부 대중의 비난은 물 끓듯 했다. 정광훈은 크게 고민하다가 마침내 매를 한아름 준비해서 대종사님에게 갔다.
“대종사님, 매 맞으러 왔습니다.” “매라니! 무슨 매를 맞겠다는 말인가?” “네, 제가 입산할 생각을 했습니다. 대종사님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불경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매를 한 아름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이 매가 다 부러지도록 아프게 때려 주십시오.” “진정 너의 잘못을 알겠다는 말인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는가?” “네, 다시는 두 번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광훈이가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매를 맞을 것은 없다. 앞으로는 두 마음 없이 한 길로 매진하라.”
정광훈은 대종사님에게 큰 절을 하고 물러 나왔다.

중산 정광훈 대봉도는 …
● 1917년 8월 30일 전남 영광 출생
● 원기 20년(1935) 1월 출가
● 남선교당 교무 / 교정원 교무부장·총무부장 / 중앙선원교감
   원광중·고등학교장 / 수위단원 역임
● 예비 출가위
● 법랍 42년
● 원기 62년(1977) 1월 17일 열반
● 원기 70년(1985) 대봉도 법훈 추서

중산 정광훈 대봉도는 1917년 8월 30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충산 정일지 정사와 모친 안타원 김동수 여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침착하며 건실하였던 중산 대봉도는 15세에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본가에 돌아와 본교의 독실한 교도인 모친의 지도로 전무출신을 작정한 후 17세 때 영산학원 1기생으로 수학하였고, 19세에 보화당 서기로 출발하여 서원을 다졌다.
중산 대봉도는 교단 역사를 통해 볼 때, 매우 개성이 강하고 특성이 두드러진다. 교단의 위기 극복에 몇 차례나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고, 교단의 행정사무체계 기틀 확립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으며, 수위단 활성화에 노력했다. 또한 선진과 후진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하섬 개척에 20여년을 헌신하였다. 정남 1호로서 매우 주도면밀했던 중산 대봉도는 일터에서 쓴 70여 편의 한글시를 남겼으며 명석한 지혜와 용기 있는 정열로 자신을 다 바친 도인이었다.
6·25때는 재무부장으로 총부 수호와 복구에 앞장섰는데, 이때부터 교단 위기극복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특히 원기 50년 원광중·고등학교가 운영상의 큰 위기에 부딪히자 어려움을 몸소 안고 교장직을 맡았다. 1년간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학교 운영을 정상적인 궤도로 끌어올려 전라북도의 모범 우수학교로까지 발전시켰다.
원기 55년 10월, 서울 남한강변에 ‘서울회관’ 건립을 시작한 것이 부도가 났을 때는 남한강 수습위원장과 서울회관 기성회장의 책임을 맡아 원광중·고등학교장, 하섬수양원장의 직까지 아울러 수행하면서 혼신의 정열을 불살랐다.
원기 59년 6월 남자 정화단이 발족했을 때 중산 대봉도는 초대 단장이 되었다. 남한강사태 수습을 끝낸 중산 대봉도는 원기 62년 1월 8일 하섬으로 들어가 며칠간 파도 소리와 벗하다 17일 새벽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웃는 얼굴로 60년의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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