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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아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2020년02월호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아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글. 김정탁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도덕경> 2장)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美) 것을 아름답다고 아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은(善) 것을 좋다고 아는데 이는 좋지 않다.  
고로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 생겨나고, 어려움(難)과 쉬움(易)이 서로 이루어지고,
긺(長)과 짧음(短)이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高)과 낮음(下)이 서로 기울어지고,
인위의 소리 음(音)과 자연의 소리 성(聲)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前)과 뒤(後)가 서로 따른다. (하략…)

<도덕경> 2장도 1장과 마찬가지로 도입부 해석에 어려움이 따른다. 2장 도입부는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로 시작하는데 과연 어떤 어려움이 따르는지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에서부터 살펴보자. 이 문장에서 유난히 까다로운 부분은 ‘미지위미(美之爲美)’인데, 관련 학자들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다. 먼저 ‘미지위미’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이다. 그리고 지(知)란 단어가 앞에 첨가되면 ‘지미지위미(知美之爲美)’인데, 이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고 아는(知)’ 일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고 아는 일’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를 잘 알아서 소리나 모양을 아름다운 것으로만 구성하는 일이다. 아티스트가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름다운 소리와 추한 소리를 구분하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모아서 연주를 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그의 역량이 뛰어날수록 그의 연주에 추한 소리는 드물고, 아름다운 소리만 많아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아티스트의 이런 연주를 두고 아름답다고 칭찬한다.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고 아는” 일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런 식의 소리 구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아티스트의 연주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긴다. 아름다운 소리와 추한 소리로 나누려는 구분 자체를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여겨서이다. 사실 소리를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구분하는 데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일 만한 객관적 기준이란 없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또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이런 기준은 늘 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유행이란 것도 생겨나는 게 아닌가. 물론 서양은 이미 오래 전에 비너스 팔등신을 만들고 이를 아름다운 인체의 이데아로 설정한 바 있다. 그래서 비너스를 닮을수록 아름다운 반면 닮지 않을수록 추하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노자의 눈에 이런 구분은 인위적인 시도일 뿐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니 노자의 귀에는 모든 소리가 똑같이 들리므로 아름다운 소리와 추한 소리 따위로 구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삶의 완성으로 파악한 이순(耳順), 즉 모든 소리가 똑같이 순하게 들리는 단계와 같지 않는가! 지금 노자도 공자가 말한 이순의 단계를 바람직하다고 설정한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이순의 단계에 이르지 못해 소리를 일일이 구분하여 아름다운 소리로만 음악을 하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의 이런 인식에 대해 노자는 답답해 한 나머지 ‘斯惡已(사악이)’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대부분의 해석들은 ‘斯惡已(사악이)’의 ‘惡’을 아름다움(美)의 대칭개념으로 파악해서 곧잘 ‘추함’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추함으로 해석하면 내용상으로 앞뒤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실제로 ‘惡’은 개념상으로 ‘美’와 관련이 없다. ‘美’와 관련을 맺으려면 ‘惡’ 대신 ‘醜(추함)’란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맞다. 미추(美醜)란 단어가 한 쌍의 조합을 이루어서이다. 그러니 이 문장에선 우연히 ‘美’와 ‘惡’으로 표면상 대칭을 이룰 뿐 내용상 대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美’의 반대 개념으로 ‘惡’을 해석하려는 유혹을 많이 지닌 탓인지 ‘惡’을 추함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斯惡已’의 ‘惡’은 단순히 ‘美’의 대칭개념이 아니라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즉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아는 것.”이란 내용에 대한 노자의 전반적인 평가에 해당한다. 그러니 ‘惡’을 ‘추함’보다는 나쁨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람직하지 않다.’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물론 이어지는 다음 문장, 즉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개지선지위선 사부선이)’도 마찬가지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에 대한 노자의 전반적인 평가가 ‘斯不善已(사부선이)’이므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좋은 것을 좋다고 아는데 이는 좋지 못한(不善) 일이다.”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들은 여기서 ‘善之爲善(선지위선)’의 ‘善’을 ‘좋음’보다는 ‘착함’으로 해석한다. ‘善’을 ‘착함’으로 해석하면 도덕적 문제로 곧바로 직행한다. 노자는 도덕적 문제를 2장에서부터 서둘러 다루기보다는 오감을 통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강조하는 것을 우선이라고 여긴다. 앞 문장에서 ‘美’란 개념을 사용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보면 ‘善’도 ‘선함’보다는 ‘좋음’으로 해석해야만 앞뒤 문장의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2장의 첫 번째 문장을 필자처럼 해석해야만 이어지는 두 번째 문장, 즉 “고로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겨나고(有無相生),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고(難易相成), 긺과 짧음이 서로 견주어지고(長短相較), 높음과 낮음이 서로 기울어지고(高下相傾), 음과 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音聲相和),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前後相隨).”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아는 것에 대해 노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했다. 노자의 이런 태도는 세상만물은 아름다움/추함으로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구분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아서이다. 오히려 아름다움이 있기에 추함도 존재한다는, 즉 아름다움과 추함이 상대편의 존재근거가 되어 공존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노자의 눈에는 있음/없음, 어려움/쉬움, 긺/짧음, 높음/낮음, 음/성, 앞/뒤가 우열로 비교되는 게 아니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공동운명체이다.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자연이 바로 그러하다. 이런 자연을 아름다움/추함, 좋음/나쁨, 심지어 옳음/그름 등으로 구분한다면 이는 도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장자> 제물론 4는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옳음/그름의 구분이 선명해지면 도(道)가 이지러져서 훼손되는 바다. 도가 이지러져서 훼손되면 그때부터 좋고 싫음의 편애가 생겨난다. 그러면 이루어져 완성되는 것과 이지러져 훼손되는 것의 구분이 정말로 있을까, 없을까? 
그런데 소리의 완성됨과 훼손됨의 구분은 옛날에 소문이 거문고를 뜯어서이고,  완성됨과 훼손됨의 구분이 없는 건 소문이 거문고를 뜯지 않아서이다. (제물론4-4)

전설상의 연주자 소문(昭氏)은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소리를 구분해서 아름다운 소리로 이루어진 음악을 선보였다. 그 결과 소문은 소리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해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란 명예를 얻었다. 그렇지만 장자의 눈에 소문은 기교만 부릴 뿐 도(道)에 통하는 연주자가 아니다. 소문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를 구분해서 오로지 좋아하는 소리로 연주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고, 긺과 짧음이 서로 견주어지고, 높음과 낮음이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 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는 자연의 원리, 즉 도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다음 호에 <도덕경> 2장이 계속됨)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