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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숭산 박광전 종사의 '일원철학'과 그 사상적 연원 2020년02월호

숭산 박광전 종사의
‘일원철학’과 그 사상적 연원

글. 박윤철

지난 호에서는 숭산 박광전 종사(본명 길진, 이하 숭산)의 일원철학 형성의 핵심 연원(淵源) 가운데 하나인 일본 동양대학 유학 과정에 대해 일견(一見)했다. 이번 호에서는 원불교학의 태두(泰斗)로서 ‘일원철학’을 정립한 숭산의 사상적 연원을 연대기적으로 탐색해 보기로 한다. 우선, 숭산의 ‘일원철학’이 형성되는 가장 뿌리 깊은 근원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부친 소태산 대종사의 큰 깨달음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숭산  자신이 다음과 같이 확고하게 밝히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자신이 알게 모르게 정신적인 훈련을 많이 받았다. 가령 옥녀봉을 향하여 소리를 질러 보라 하시고는 “저편에서 다시 네 목소리가 되돌아오는데 왜 그러겠느냐?” 즉 메아리에 대한 의문을 상기시켜 주셨고,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네가 잡을 수 있겠느냐?” 하시며 가끔씩 나의 생각과 사고의 성장을 지켜봐 주시며 단련을 시키셨던 것이다. (<숭산종사 추모기념대회: 아 숭산종사>, 2004년 12월 3일, 39쪽)

위 내용에 따르면, 숭산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부친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다양한 측면에서 ‘철학적 사고’ 훈련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어린 아들 숭산 종사에게 단순히 혈육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들의 정신세계가 넓고 깊게 성장하도록 이른바 ‘철학적 사고’ 훈련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탁월한’ 철학교사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그 같은 ‘철학적 사고’ 훈련은 어린 숭산의 정신세계 형성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하였음을 아래와 같은 숭산 자신의 회고에서 살펴볼 수 있다.

생각할수록 꿈같은 어린 시절, 비(非)문명지대 영산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정신세계의 단련은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과정으로서 종교적 본질로 다가서는 기초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한 정신문명의 산실에서 나는 거침없이 자랐고 삶의 방향과 지침을 배우고 닦을 수 있었다. (위의 책, 39~40쪽) 

숭산이 어린 시절을 보낸 전남 영광 백수읍 길룡리, 즉 영산(靈山)은 ‘비문명지대’라고 말해질 정도로 물질문명, 다시 말해 근대문명의 세례가 아주 더디고 더딘 곳이었다. 그러나 비록 물질문명=근대문명의 측면에서 개명(開明)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산간벽지였지만, ‘탁월한’ 철학교사로서 손색이 전혀 없는 부친으로부터 정신세계의 단련, 즉 ‘철학적 사고’의 훈련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숭산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 종교적 본질의 기초가 형성된 가장 값진 시기로 자부하고 있다.  

이렇게 영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부친으로부터 ‘철학적 사고’의 훈련을 통해 종교적 본질의 기초에 다가설 수 있는 기본 소양을 닦은 숭산은 보통학교 진학을 통해 처음으로 ‘근대적’ 교육의 세례를 받는다. 즉 11세 때인 1925년에 영광에 있는 백수중앙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가 이듬해 이리보통학교로 전학한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이리 송학동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리보통학교 시절은 숭산에게 과연 어떤 인상으로 남았을까?

모처럼 소도시로 나온 나는 얼떨떨했다. 논두렁과 밭고랑을 지나 산실로 다니던 학교길에 시멘트집들이 들어서고 차들이 오가는 시내로 나오게 되었으니 시골 아이의 수줍음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이런 생소함도 사라지게 되었고 학교성적도 우수해 졌다. (중략) 운동에도 둔하지만은 않은 듯 릴레이선수로도 뽑혀 뛰었고 우승도 하였다. (위의 책, 41쪽)

위 내용에서 숭산이 ‘시멘트집과 차들이 오가는 시내’라고 회고하고 있듯이, 1925년의 이리는 일본인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지금의 익산역에서 중앙통 거리를 거쳐 인화동 남부시장까지는 일본인 거리가 조성되어 번화가를 이루고 있었고, 2층으로 된 이리역은 1층은 호남선을 비롯하여 전라선과 군산선 등을 오가는 승객들로 넘쳐나고, 2층은 먼 길을 가야 하는 여행객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바로 이 같은 ‘근대적’ 풍경은 비문명지대 영산에서 올라온 어린 소년 숭산에게 참으로 ‘얼떨떨’ 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미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철학적 사고’ 훈련을 남부럽지 않게 받았던 숭산 종사는 금세 이리의 ‘근대적’ 생활에 적응하여 학업뿐만 아니라 체육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에 이른다. 학업과 체육 분야에서 모두 소질을 인정받은 숭산은 이윽고 서울 유학길에 오르게 되고, 서울 유학 생활 중에는 축구선수로도 활약하기에 이른다.(사진 자료 참조)

보통학교를 졸업한 숭산은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고보)로 진학한다. 그때가 1931년으로 약관 17세의 나이였다. 그렇다면 숭산은 왜 하필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을까?

앞으로 종교인이 되어야겠다는 대전제가 확고했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해서도 알아야한다는 강한 의욕에서 기독교재단에서 설립한 배재를 택하게 되었다. 특히 배재는 종교적 배경은 물론 독립정신이 투철한 교육도량이라는데 더욱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배재는 이승만 전 대통령, (몽양) 여운형 씨 등을 배출하기도 하여 일제치하의 민족정신 고취의 전당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의 책, 41쪽)

위의 회고에 의하면, 숭산은 배재고보야말로 기독교재단으로써 민족교육에 투철한 교육도량이었기 때문에 선택하였다고 말한다. 종교인이라면 타종교를 알아야 하는데 기독교재단에서 설립한 배재고보는 타종교 이해에 안성맞춤의 교육도량이며,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할 만큼 민족교육에 투철한 교육도량이어서 진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숭산의 ‘일원철학’ 형성의 사상적 배경은 어린 시절에 부친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받은 ‘철학적 사고’ 훈련을 그 사상적 기초로 하여, 보통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접했던 ‘근대적’ 교육 과정을 통해 서서히 발아하고, 그다음 배재고보 시절에 더욱 그 뿌리가 깊어져 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숭산 종사의 사상이 배재고보 시절에 한 단계 더 깊어져 가고 있음은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 잘 드러난다.

매주 토요일에 개최되는 학교 예배시간에 참석하여 많은 견문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이 예배시간에 학교당국에서는 저명인사를 초청,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찬송가와 기도를 통해 종교적 정서를 함양시켰다. 나는 목사의 설교와 사회 인사들의 강연을 통해 종교적 교양을 쌓는데 열중하였다. 감명과 얻은 바가 많았다. (위의 책,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