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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정타원 이정은 종사 2020년01월호

“내가 너의 아버지 대신
잘 보살펴주겠다.”

나는 원기 26년(1941) 19세 때에 자연스럽게 출가를 할 수 있었다. 영산에서 총부로 올라올 때 정산 종사님(당시 영산지부장 겸 신흥교당 교무)께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성타원(이성신)님과 함께 그냥 올라왔었다. 총부에 도착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이하 대종사님)께 “정산 종사님께는 말씀도 못드리고 이렇게 왔습니다.” 하고 사실대로 말씀드리니, 대종사님께서는 놀라시며 “어서 정산에게 편지해라. 얼마나 걱정하겠냐?” 하고 일러주셨다. 우리는 곧 잘못을 뉘우치고 정산 종사님께 상서를 올렸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편지를 받으시고는 “너희가 가는 것을 못 보고 이렇게 편지 받고 답을 하노라.” 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내주셨다. (중략)
대종사님께서는 늘 주변의 정리정돈을 깨끗이 하도록 가르치셨다. 마당을 쓸 때에도 검불은 손으로 줍고 팬 곳은 메꾸어 고르게 하라고 이르셨다. 그래서 총부는 비록 큰 건물은 없었지만 항상 깨끗하고 잘 다듬어져 선경같이 보였고, 외부인들은 밥알도 주워먹겠다고 감탄하였다.
하루는 말끔히 청소된 마당을 지나시다가 감나무에서 감꽃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을 보시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감꽃이 떨어진다. 조금 있으면 감이 열리지. 감이 열리면 아직 푸른 땡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오래 나무에 매달려 자라고 익은 감도 떨어진다. 너희들도 중도에 떨어져 버릴 감이 아닌지 대조해 보아라.”
대종사님의 말씀은 평이하셨지만 그곳에 모인 우리 모두는 나무와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에 깊은 교훈으로 새겨 지녔다. 나는 가을의 푸른 하늘 아래 무르익은 붉은 감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 쉽고 간결한 몇 말씀이, 시간이 지나고 날이 거듭할수록 더욱 새롭다. 그리고 나를 지키는 튼튼한 지주가 되었음을 지금도 느낀다.
감나무 아래에서 받든 교훈이 내 믿음의 뿌리를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었다면,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마다 힘이 된 또 한편의 법문이 있다.
우리들은 서하실에 모여 있었다. 대종사님의 말씀은 누구라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씀이셨고, 늘 우리들 마음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나는 때로는 서양에, 때로는 동양에 판을 벌릴 것이다. 이를 기러기 떼에 비유해 보자. 어느 곳엔가 판을 벌려 놓을 때는 그곳에서 여러 기러기들은 배불리 먹이를 먹기도 하고 놀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선두 기러기가 날개를 펴고 어느 곳으로 인가 가자하고 날면 뒤돌아볼 것 없이 주욱 따라 날아야 한다. 먹을 것에나 다른 어떤 것에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으면 못 따라 나선다. 나는 기러기 떼들에게도 총이나 화살에 맞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경계가 있다. 너희에게 총과 화살이 되는 것은 재(財)와 색(色)의 경계이다.”
우리들은 오월의 푸른 보리 이삭들이 바람을 따르듯이 대종사님의 말씀에 젖어 있었다. 대종사님께서 동양에 태어나시면 동양에서, 서양에 태어나시면 서양으로 이생도 내생도 영원한 생을 한결같이 모시고 따라 다니리라 마음먹었다. 이 법문은 아직도 당연한 내 영생의 지표로 자리 잡고 있다.
대종사님께서는 우리들을 알뜰히도 보살펴주셨다. 끝없이 너그러우시고 한없이 자애로우셨다. 우리는 인자하신 부모님 슬하의 천진한 아이들처럼 구김 없고 자유로웠다. 설혹 꾸중을 내리셔도 섭섭함이 있을 리 없었다. 더욱 잘해보려는 마음을 다질 뿐이었다. 내게도 대종사님은 한없이 넓은 하늘이시며 한없이 편안하신 어버이이시고 한없이 미더운 대지이셨다. 대종사님은 아직 나이가 어리던 우리들을 둘러보시며 자주 말씀하셨다.
“너희 어린 사람들을 지방에 보낼 때 나는 잠이 안 온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음으로 너희가 있는 지방 하나하나를 돌아본다. 그때마다 너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지방에 사는 동안 이 말씀이 떠오를 때마다 대종사님께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정성을 다했다. 지금도 하루를 보내고 나면 대종사님께서 우리들을 둘러보시고 걱정하시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생을 잊어본 일 없이 간직하고 살아온 법문들이다. 아직도 실제로 곁에 모시고 말씀을 받들 듯이 느껴지는 생생한 교훈들이다.
나는 특별한 재주라고는 없다. 그저 스승님의 크신 은혜에 듬뿍 젖어 살았다.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던 동안의 스승님의 훈증 속에서 사심 없이 오롯이 믿고 의지하며 가르침대로 살았다. 열반 후에도 시키신 대로 살려고 애썼다. (중략)
총부에서 대종사님 슬하에 2년간을 살았으나, 나는 똑똑하지도 못했고, 인생문답도 별로 해보지 못했다. 다만 “너의 아버지(응산 이완철 종사)가 전무출신 하느라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정을 베풀어주지 못했을 터이니, 내가 너의 아버지 대신 잘 보살펴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정타원 이정은 종사는 …
● 1923년 12월 21일 전남 영광 출생
● 원기 26년(1941) 6월 1일 출가
● 경남·산동·이리·서울교당 교무 / 마산·대구교구 교감 겸 교구장
   수위단원 역임
● 정식 출가위
● 법랍 51년
● 원기 73년(1988) 대봉도 법훈 서훈
● 원기 76년(1991) 종사 법훈 서훈
● 원기 95년(2010) 3월 1일 열반

정타원 이정은 종사는 1923년 12월 21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에서 부친 응산 이완철 종사와 모친 유화윤옥 여사의 1남 4녀 중 3녀로 출생하였다.
원기 6년(1921) 부친이 출가한 후 모친은 힘겨운 농사일을 했고 할아버지 몰래 산에 가서 나무까지도 했지만 조금도 부친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고, 집안일이 아무리 바빠도 자녀들이 학과 공부에 충실하도록 했다. 그러던 원기 12년, 신흥교당이 창설되었다. 이 무렵 신흥마을은 영산의 저축조합을 본받아 수신조합을 경영하면서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고 차츰 모범부락으로 발전해 갔다. 자연스럽게 원불교적인 분위기에 젖었던 정타원 종사는 큰언니인 상타원 이태연 대봉도의 뒤를 이어 19세 되던 6월 영산학원으로 들어가 3개월간 공부하다가 1년 먼저 전무출신한 언니 성타원 이성신 종사를 따라 총부에 오게 되었다.
정타원 종사는 몇 달간 학원에서 공부하다 여사무원이 되어 4년간 개인내역 사무를 보았다. 이때 구타원 종사의 지도로 분명한 일처리와 정확한 시간 생활을 배웠다.
유일학림 졸업 후 첫 교화장소는 경남교당(현 부산교당)이었다. 이어서 산동·이리·서울·마산교당 등에서 봉직했다. 원기 41년부터 15년간 이리교당에서는 병을 잊은 채 몸과 마음을 온통 교단에 맡겨버리고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대중이 원하는 대로 살았다. 이후 이리교당은 교화가 번창하여 내왕하는 교도가 오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원기 56년 5월 서울교당으로 부임하여 교화 기반이 잡히자 연원교당 불리기에 주력했다. 원기 58년 4월 구로교당을 시작으로 마포·성남·개봉·대방교당을 설립했으며 충주와 소록교당의 설립기반을 닦았다. 원기 62년 5월 마산교구장으로 부임해서는 의창·신창원·동마산·산청교당을 창설하고 수양원도 마련하였으며, 원기 71년 2월부터는 대구교구장에 봉직했다. 교화개척과 전무출신 인재양성을 위해 온통 바친 생애였다. 일찍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죽고 사는 문제는 진리에 맡긴 채 오직 혈성으로 공도에 헌신하다 가리라는 각오로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