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도사 무도사

지리산국제훈련원①
글. 백시우 교무·지리산국제훈련원  

 달빛이 내린다. 큰 창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스민다. 손과 얼굴을 씻은 물을 흘려보내고 단정한 차림으로 밤새 몸을 뉘었던 컨테이너 하우스 문을 연다.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이 아득하다. 동트기 전 어두운 하늘에 북두칠성과 오리온이 선명하다. 맞은편 산기슭 암자 희미한 전등, 일면 없는 수행자는 오늘도 마음의 등불을 밝힌다.

새벽 내음 맡으며 대각전으로 발길을 놓는다. 땅 딛는 발걸음 소리와 요사채 처마 끝 풍경이 들려주는 바람의 노래,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 새들의 지저귐이 아우러져 적막한 도량을 깨운다. 법당에 발들이기 전 잠시 멈춘다. 달무리 진 걸 보니 비가 오려나 보다.
구름이 짙어가는 오후, 낡은 셔츠에 빛바랜 군복바지를 입고 면장갑과 무릎 높이까지 오는 장화를 챙겨 내려갔다. 원불교 노인요양시설 경애원 곁 밭에 다다르니 늘 물이 고여 애먹이던 밭 끄트머리에 포크레인이 배수로를 파 놓았다.

훈련원장 김법은 교무님과 경애원 김광우·김종찬 교무, 그리고 이도선 님을 비롯한 재가교도들은 30~40cm 간격으로 멀칭비닐에 구멍을 내 항암배추와 일반배추 모종을 심었다. 자투리 밭에 무씨를 뿌리고 나니 날이 져 어둑하다.

모종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정성으로 길렀으나 전례 없이 긴 가을장마와 잦은 태풍에 노균병과 무름병이 퍼져 어린배추가 시름시름 앓았다. 그대로 방치할 순 없어 시든 잎사귀를 뜯은 후 농약에 영양제를 섞어 뿌려 보살피며 살려냈다. 배추 속이 차오를수록 단풍이 짙어갔다.
11월 말 초겨울 맑은 날에 다 자란 배추와 무를 뽑아 1톤 트럭에 실어 경애원 마당에 부렸다. 지난해보다 수확이 적었으나 깃들인 땀이 배신하지 않아 동네 여느 배추보다 알찼다. 거친 겉잎을 떼고 반으로 가른 다음 소금이 잘 배도록 밑동에 살짝 칼집을 내준 뒤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려 큰 통에 담고 소금물을 부었다.

이튿날 아침, 숨죽은 배추를 맑은 물에 세 차례 씻어 물이 잘 빠지도록 경사진 곳에 재어 뒀다가 김장비닐에 넣고 무게를 달아 박스 포장했다. 먼 곳은 택배로 보내고 가까운 데는 직접 배달했다. 남은 배추로 백김치를 담갔으니 이는 내년 지리산을 찾아오실 선객들 몫이다.
텅 빈 밭을 지나 다시 산 중턱 훈련원에 오른다. 절임배추로 번 돈을 법신불 일원상 전에 헌공하고 향을 사른다. ‘본래 당신 것이었습니다.’ 묵상하며 사배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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