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연표 자료 공백 유감 ①

글. 이정재

필자는 앞서 교단 내 증산교 관련 언급이 터부시됨에 대해 훗날의 검토를 약속했다.
그 상세한 내역은 차차 풀어야 하겠으나,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정산이 쓴 <불법연구회창건사> 집필의 근거와 이유 및 당시 정황에 의한 제한점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당시 일제가 실시한 ‘유사종교철폐론’이란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증산교 계열 보천교(‘훔치교’라 칭하기도 했음)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 세력은 점점 커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빌미를 찾고 있던 중, 총독부는 중대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유사종교 철폐령은 그 어떤 단체도 한국적인 것이라면 쓸어버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불법연구회(이하 불연)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 심각성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기미년 독립운동 이후 문화적 유화책을 쓰며 느긋하게 대응했던 총독부의 처사가 여유를 부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한편 이 20여 년의 시기는 ‘불연’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소태산은 변산에 은거하며 (동학과 참동학의 다수)제자들을 모으고 1924년 익산 신룡동 창립까지, 그리고 36년 철폐령까지 어느 정도의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그러나 36년 이후, 장담할 수 없는 고비가 닥친다. <원불교교사>에 보면 당시의 정황이 황이천 순사 일화와 익산경찰서 연행 및 수차에 걸친 일경과의 갈등 등으로 잘 그려져 있다. 이런 시기 박중빈이 강증산의 제자였다는 것을 기록한다면 ‘불연’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증산교와의 연관성은 그 어느 것이라도 일체 잘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창건사가 1924년 창립기도 아니고, 대각 후 20년도 넘은 1936년에 나오게 된 이유는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 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증산교와의 철저한 무연고를 증명하려 한 일이었다. 창건사의 기록이 소략해지고 내용도 약간은 촌스럽고 유아적으로 처리된 것은 그런 의중이 저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제의 탄압 때문에 늦게서야 대처를 하게 되었다면, 그 이전에는 친 증산교의 행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소태산은 이미 방언공사를 하던 시점에 영광의 수배 대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도 그렇지만 화해리에서 온 증산교의 종도 정산 송규를 제자로 두고 있던 점도 해당된다. 불연은 사실 이미 초기부터 감시의 대상이었다.

정산과 소태산이 변산으로 들어간 것은 잘 알려져 있듯 감시망을 피한 은신의 의미가 컸다. 그러나 왜 하필 변산이냐 하는 문제도 야기될만한 질문이다. 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 발굴의 적지를 동시에 택하였던 것이다. 월명암 너머에는 동학과 증산교의 본거지인 김제, 정읍, 전주, 원평, 금산사 등이 즐비한 점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물을 쳐놓으니 실제로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물의 떡밥은 미륵사에서 이루어졌다. 죽은 자를 살려주자 강증산이 예언했던 대선생이 강림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를 찾아 제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논외의 언급이 필요하다. 총부를 왜 한성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많이 제기하곤 한다. 이 역시 당시의 정황과 관련이 있다. 총독부가 있고 감시의 망이 촘촘한 구역에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것을 미리 간파한 소태산이 본부를 멀찍이 위치시킨 것이라면 너무 과한 억측일까. 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탁월한 지혜의 결과다. 실제로 당시 한양에는 천도교를 비롯한 많은 신흥교단들이 있었다. 조계사 외에는 남아난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오늘날도 종종 총부의 이전 문제를 놓고 의견이 대립되는 경우를 본다. 익산 총부 부동설은 정통성과 소태산의 선택을 맹종만 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당시의 정황을 알고 나면 마냥 우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다. 

1929년에 백학명은 열반한다. 지금도 서있는 내장사 입구 그의 유허비에는 ‘우바새 박중빈’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소태산은 학명의 제자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불연으로서는 자신들의 정체가 불법에 기연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었다. 당신이 불자라는 사실은 공식화되었다. 그의 법명은 학명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혹자는 스스로 지은 것이라 하지만 있을 수 없는 비상식이다. 학명의 제자가 된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학명과의 기연은 ‘불법과의 인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당시 처화는 증산계의 일파로 분류되어 일경의 추적을 받고 있던 때다. 방언공사 직후 월명암으로 들어간 것은 교서편찬의 뜻도 있었지만 은신처의 역할을 같이 했었기 때문이다. 학명이 이런 그에게 법명을 준 것은 나름의 깊은 속뜻이 있었던 바이고, 소태산 스스로도 수용할 수밖에 없던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다만 은신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불연과 신룡동 창립은 목전의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법을 주체로 교리구성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정전에 불조요경을 따로 배치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불법을 주체로 했던 과정에서 우리는 또 은신과 지혜로운 처사, 두 양면성을 동시에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증거가 <조선불교혁신론>이다. 이것이 유사종교 철폐령 직전인 1935년도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소태산은 어느 누가 봐도 불자이지 증산교도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이것은 정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태산이 그를 학명에게 보낸 것은 일종의 신분세탁과 같은 것이었다. 증산교와의 연결을 끊고, 불자로 둔갑시키기 위한 것 역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립 후 이어진 여러 차례의 익산서 연행에도 불구하고 풀려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앞서 본 신분세탁의 효과가 컸던 셈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세탁만은 아니었고 동화의 과정과 결과에서 승화된 창조물을 내놓는 결과로 이어진다. 오죽하면 교리도에 ‘천황은’을 사은에 포함시켜 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연하게 유지시키며 대처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불교정전> 초간본에는 그렇게 되어있었다).  

‘불연’ 당시는 증산계열의 철저한 은폐과정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은 불법으로 기우는 흐름을 자연스레 형성케 하였다. 이때 정산, 주산과 서대원의 역할이 컸다. 증산교는 배제하고 불법을 바탕으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상의 측면에서 드러나는 현저한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풀어야 할 큰 과제였다. 진리는 같지만 시대에 따라 그를 펼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의 결과가 교리도다. 즉 불법과 증산사상(혹은 전래의 동양사상 전반)의 결합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결합에는 어떤 촉매가 필요했다. 그 촉매는 <옥추경>이 담당하였던 것이다(추후 더 보강된 설명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강증산과의 무 연고성을 내세우던 이런 분위기는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새로운 세계에 당면한 새로운 개선과 수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즉 증산교 터부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지고 아무 이유없이 경계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왜 증산교가 터부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고, 왜 그런 성찰이 없었던가 하는 점도 반성되어야 한다. 이를 터부시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를 밝혀 더 드러내고 유구한 역사적 정통성을 살려내야 할 부분이다. <대순전경>이나 <도전>을 읽어보면 강증산은 위대한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그가 광인이었다는 평판은 추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원불교의 원융한 사상과도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원불교는 종교의 울을 넘어 하나 됨을 지향한다. 그것이 일원사상이며 삼동윤리가 아닌가. <대종경> 곳곳에서도 증산교에 대한 역할을 인정한 바 있다(<대종경> 31장 제6 변의품/ <원불교 교사> 3. 한반도의 종교 제1편 개벽의 여명/ <대산종사법어> 23장 제14 개벽편 등). 더구나 원불교가 드러날수록 같이 드러날 것이란 부촉을 소태산 스스로 천명한 바 있다. 연구를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하지 않음이 오히려 본의에 반하는 일이다. 일제에 의해 비틀어진 정기와 체계를 바로잡을 과제와 사명을 후학들이 담당해야 할 일임을 새겨야 하는 시점이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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