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골든타임

● 꽃이 피면, 나비가 날아든다
    김준영 | 교무(1급)·중앙중도훈련원
● 대중 속에 뿌리 내린 생활종교로 거듭나야!
    오광선 | 교무(2급)·휴양
● 교단 위기극복의 실마리,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이대진 | 교무(3급)·영산선학대학교
● 6G 시대를 위한 준비
    이도광 | 교무(4급)·성무교당
● 영성 실력이 승부수다
    박재성 | 교무(5급)·부천교당


꽃이 피면, 나비가 날아든다

급변하는 교화환경에 직면해 종교 인구가 빠른 속도로 감소함에 따라 각 종교계는 온몸으로 그 위기를 체감하며 대안 마련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친 영혼을 쉬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영성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지만 종교적 도그마는 기피하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고자 이 땅에 출현한 원불교는 그 존재 이유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원불교는 과연 종교계에 불어올 이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어떤 길을 모색하고 있는가? 다행히 일각에서는 ‘훈련’과 ‘변화’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전산 종법사 시기를 ‘원불교 골든타임’으로 간주하고 주시하며 기대하고 있다. 골든타임, 원불교는 어떻게 이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꽃을 피워야 한다. 저마다의 향기와 빛깔로 뿜어내는 꽃밭이 먼저다.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위기가 심각할수록 꽃이 필 수 있는 토양을 준비하고, 씨앗을 뿌리고, 정성 들여 가꾸고 꽃을 피워야 한다.
꽃은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화력 갖춘 사람, 법력에서 우러나는 감화력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외로움에 지친 영혼을 편히 쉬게 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 길을 묻는 이에게 앞길을 열어주고, 일상에서 직면한 문제로 갈등하는 이에게 그 해결의 지혜를 나눌 수 있다. 결국 교화가 그것 아닌가? 원불교를 알리고 원불교 법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나은 사람,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안내자가 된다거나,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우미의 역할을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교당이나 미디어를 갖고 있더라도 그런 감화력 있는 사람이 없다면, 벌 나비가 날아들 수 없다.
결국 사람인데, 그렇게 꽃피워야 할 사람은 어디에 있나? 바로 이미 교단 안에 서원과 발심으로 들어와 있는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이다. 종교에 무관심하게 등 돌리고 있는 타인이 아니라 출가를 서원한 교무는 물론 신실한 믿음을 가진 교도들이야말로 바로 이 위기를 함께 헤쳐나갈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꿈꾸게 해야 한다. 스스로 이해하고 체득한 원불교 법에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더해 다채로운 교화를 실험하고 이끌어가도록 인정하고 지원하고 기다려줘야 한다.
기존의 교화 형태나 방식을 유지할 곳은 그렇게 하더라도, 필요한 경우 과감한 통폐합과 구조조정, 새로운 교화모델 개발 등을 통한 교화 다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실험이라도 해야 한다. 변화난측한 이 시대를 살아남아 원불교의 존재 이유를 실현할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원불교로 머물러선 안된다. 광대무량한 낙원건설을 위해 세계교화는 필수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국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그 서있는 곳이 어디든 ‘세계를 마음에 품고’ 서로 힘을 합하여 ‘하나의 원불교’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획일적인 방법이 아니라 다채로운 향기와 빛깔로 문턱을 낮추고 세계 곳곳의 일체생령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혹독한 겨울이 온다고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원불교 교단 구성원 모두가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스스로의 서원과 역량을 살펴보며 깨어나야 하고, 교단적으로도 인식의 전환을 통해 기존방식에 대한 틀을 과감히 내려놓고 새로운 접근법을 강구해야 한다. 자, 어디서부터 그 시작점을 찾을까? 당면한 과제의 해결방식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어떨까?

대중 속에 뿌리 내린
생활종교로 거듭나야!

인구의 95%가 가톨릭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마찬가지로 인구의 대부분이 불교도인 미얀마나 라오스 등 동·서양을 물론하고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종교와 생활은 따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이 사회를 유지 발전시켜 왔다. 어디 이 나라들 뿐이겠는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종교가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교육과 군대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삶 깊숙이 영향을 미치며 명멸을 거듭해 오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물질문명으로 인한 시대의 변화와 경제적 풍요, 삶의 질 개선으로 인해 이미 유럽을 비롯한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을 필두로 탈종교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실지로 유럽권 국가들의 대형 교회당들 상당수는 이미 관광명소로 탈바꿈한지 오래되었고, 소도시나 농촌의 교회당들은 주변이 온통 묘지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산사람들보다는 죽은 자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으로 변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시대가 바뀌면서 정해진 날에 한데 모여서 신앙행위를 하는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과거와 같은 종교 활동만으로는 더 이상 다종다양해진 종교인구의 이해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가톨릭이 아닌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가톨릭이고, 생활 전반에 걸쳐 가톨릭 정신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일요일에 직접 교회나 성당 또는 교당을 찾는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감소기에 접어들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점차적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훨씬 늘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를 볼 때 우리 교단도 향후(교무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일부 법회출석 수가 늘어나는 교당도 있겠지만) 총량적으로 보면 지금보다 증가하기는 어렵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탈종교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기존 불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법으로 대중의 정신을 개벽하기 위해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표방하고 이 땅에 출현한 우리 교단도, 이제는 대중이 모여 사는 시내에 교당만 있으면 이 과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교 백년이 지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우리 원불교가 대중과 함께 생활 속에서 뿌리박고 대중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갈 종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들 스스로가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인품을 갖추어 나가고, 또 교당이 그러한 인품을 갖춘 사람들을 길러내는 양성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새로운 시대와 생활에 적합한 제도를 갖추고 그에 부합되는 정책과 비전을 깊이 있고 현실성 있게 연구하고 제시하는 교단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교단 위기극복의 실마리,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현재 원불교는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크고 무거운 주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원만한 해답을 내놓을 만큼 지혜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생각도 그 문제 해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다. 나는 이 큰 문제의 해답을 소박하게 나의 삶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물었다. ‘내 삶의 위기는 언제였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전무출신의 서원이 약해지고, 마음이 세상 욕심에 자꾸 흘러갈 때였다. 또 하나는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때로는 미운 마음이 너무 커져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괴로웠을 때였다. 그래서 한 때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가 극복되었고, 나에게도 황금기가 찾아왔다.
나의 황금기는 출가 서원이 내 마음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을 때였고,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며 교화와 사업에 성공을 이룰 때였다. 특히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과 살면서도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그 특성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수용할 수 있는 때였다. 길지 않은 출가의 삶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속에도 출가생활을 그만하고 싶을 만큼 극도의 위기도 있었고, 영생을 오늘처럼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행복한 시간도 있었다. 환경은 똑같았지만 그것은 다 내 마음의 상태 여하에 따라 하늘과 땅처럼 달랐던 것이다. 즉, 위기와 행복은 나의 출가 서원의 크기와 경계를 수용하는 마음공부 실력에 좌우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교단을 말하다 보면 자칫 나를 제외한 밖으로의 외부 집단을 교단으로 상정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개개인이 모여서 교당이 되고, 교단도 되고, 세상도 된다. 교단 구성원들 중 다수가 출가정신이나 마음공부에서 위기에 처해 있으면 교단은 그만큼 행복하지 않고, 교화도 안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뚜렷한 서원과 충분한 삼대력을 갖춘 구성원이 많으면 곳곳에 행복이 넘치고 교화가 발전하는 등 교단의 황금기가 열릴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11월초 출가교화단 총단회에서 종법사님이 대산 종사께서 법문하신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사물의 근본이 서면 도는 저절로 생겨난다는 뜻)과 공부위주교화종(工夫爲主敎化從)을 강조하신 것은 매우 날카롭고 적중하게 교단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때때로 교화가 안 되면 밖으로 교도나 함께 근무하는 교무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곤 한다. 이제는 먼저 교화를 하는 당사자인 ‘자신의 공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순수하고 오롯한 무아봉공의 출가정신으로 교화에 노력하는가? 함께 사는 교무와 교도들을 천지처럼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며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으로 불공을 하는가?’
본립이도생과 공부위주교화종은 교단 위기극복을 위한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이정표다.

6G 시대를 위한 준비

며칠 전 인터넷 뉴스에서 ‘6G 경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일본과 미국이 6G(6세대) 이동통신 기술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을 맺고 내년 봄까지 미국에 6G 사업 추진을 위한 조직을 꾸릴 예정이며, 이들의 목표는 차세대 통신에 적합한 첨단 반도체를 개발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올해 한국, 미국, 중국 등에서 5G 이동통신 서비스가 상용화된 데 이어 벌써부터 6G 기술 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현재 상용화되는 5G(5세대) 이동통신 기술만으로도 모든 사물과 인터넷 통신이 연결되어 사람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사물들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신기하고 놀라운데, 이보다 더 앞선 기술을 개발하는데 경쟁을 한다는 기사는 가히 섬뜩했다. 
인류는 끊임없이 개발하고 또 개발하며 과학문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어나가는 과학문명의 개발이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더 빠르고 편리하고 정확한 인류를 건설하기 위해 개발한다고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을 벌어들이려는 필요 이상의 개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갈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만약 이 시점을 놓치고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 인류는 과학문명의 노예가 되어 육신의 자력을 잃어버린 암울한 시대에서 정신적 고통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는 날들이 다가올 것임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100여 년 전 일원의 진리에 큰 깨달음을 얻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마치 이러한 시대를 예견한 듯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또한 정신 문명과 물질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들을 일상생활 안에서 실천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일원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교리를 밝혀주었다. “물질 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 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 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 준 것과 같아서 (중략) 이는 육신은 완전하나 정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고, 정신 문명만 되고 물질 문명이 없는 세상은 정신은 완전하나 육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나니, 그 하나가 충실하지 못하고 어찌 완전한 세상이라 할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내외 문명이 병진되는 시대라야 비로소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가 될 것이다.”라며(<대종경> 교의품 31장)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까지 했다. 
원불교는 이러한 교리로 급속도로 발전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목적으로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현 사회의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과 역할이 애매모호한 시점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원불교의 교리가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여, 시대에 맞는 다양한 실천방법으로 많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전산 김주원 종법사는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기적인 시간과 일상생활에서 원불교 교리를 실천하자고 선포하며 새로운 원불교 교문을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기회에 원불교는 전문적인 홍보팀을 구성해 더 많은 대중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알릴 수 있는 적극적이고 획기적인 홍보활동을 펼쳐야 한다. 원불교 교리가, 앞으로 다가오는 6G 시대를 슬기롭게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할 때다.

영성 실력이 승부수다

요즘 훈련을 가거나 교구 회의를 가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교화가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선배 교무들께서 대책 마련에 시급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신 조차도 15년 후 과연 원불교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는 한다.
신입교도는 크게 늘지 않고 기존의 교도들만 그대로 연세가 들어가고 열반한다. 그런데 이는 원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 보인다. 이웃 종교들도 신도의 절대적인 숫자는 많지만, 과거와 비교해 보면 신입 신도 수는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부교무의 시선에서도 현재 교화가 위기로 느껴진다면 이는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얼마 전 팟캐스트에서 한 방송 진행자가 ‘영성총량의 법칙’을 이야기 했다. 종교를 찾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으나 영성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길을 걷다보면 명상 센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그 숫자도 점점 늘어나는 느낌이다. 돈을 내면서까지 명상을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각종 불경이나 도덕경 같은 동양 고전 강의도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튜브에만 들어가도 집안에서, 심지어 무료로 영성 콘텐츠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콘텐츠들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즉 현대인들은 이미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 영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그것을 배우려고 한다. 하지만 영성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들이 대부분 종교에 집중되어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굳이 종교를 찾지 않아도 영성을 키워나갈 수 있는 시대다.
허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탈권위 시대가 시작됐다. 특히 대부분의 2030세대는 성직자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직자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도 영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종교를 찾을 이유는 더욱 없다. 탈권위·탈종교의 시대에 들어온 지금, 더 이상 법복이 주는 권위에 의존하여 교화할 수 없다.
과거의 종교는 마음병의 마취제였다. 종교를 다니고 종교활동에 참석함으로써 그 시간만큼은 실생활 속에서의 아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세대는 마취제가 아닌 실질적인 치료제를 요구한다. 단순히 아픔을 잠깐 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치료받고 영적인 성장을 바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외부의 영성 콘텐츠에 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성직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교화가 아니라 개개인의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때가 이미 왔다. 지금부터 철저히 신앙·수행하여 스스로부터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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