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의
독립운동 시리즈를 마감하며


- 백범과 정산의 극적인 만남을 중심으로 -

글. 박윤철

영산성지에 살 때 승타원 송영봉 종사를 초청하여 법석(法席)을 연 적이 있다. 그 법석에서 승타원 종사는 1945년 8.15해방 직후 서울출장소 근무 당시 몸소 겪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해 주셨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에 관한 일화로, 사연인즉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새벽같이 백범 선생이 한남동 출장소로 오셨단다. 당시 서울출장소 소장은 대산 김대거(1914~1998) 종사였는데 기별도 없이 불쑥 오신 것이다. 어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을 했는지 자초지종을 여쭈니, 백범 선생 왈 “오늘이 내 생일인데 남북이 서로 갈라져 싸우고 있고, 또한 일찍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백범의 장남)을 잃은 큰 며느리랑 함께 사는데, 그 며느리로부터 생일상 받는 것도 민망해서 연락도 없이 일찍 오게 되었노라.” 하시고 아침 한 끼를 부탁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그 사연을 접했던 때는 1991년 무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8년 전의 일인데 어제 들었던 이야기처럼 뇌리에 생생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렀어도 ‘어찌 백범 선생은 생일날 아침에 가실만한 곳이 여러 곳 있었을 텐데, 하필 이름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고, 교세도 미약하기 짝이 없던 불법연구회 서울출장소를 찾아오셨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 해묵은 의문을 풀고자 관련 자료를 뒤적여 보기도 하고 구체적 증언을 해줄 만한 분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지만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오랜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는 뜻밖에도 원불교의 독립운동 시리즈를 연재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로 발견됐다.

작일(1945년 12월 4일) (중략) 전북 익산군에 본부를 둔 불법연구회 대표 송규 씨가 심방하여 환영사를 드리고 임정 지지를 맹서하였다. (<민중일보> 1945년 12월 5일, 2면)

(1945년 12월) 3일과 4일 죽첨동 숙사로 김구 주석 이하 요인을 왕방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3.1동지회, 불법연구회, 대한민국임시정부환도 환영 경남위원회, 국민당 안재홍 씨 외 12명. (<자유신문>, 1945년 12월 5일, 1면)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구 주석을 수장으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에서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에 걸친 파란만장한 항일독립운동을 접고 1945년 11월 23일 환국(還國)한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민중일보>와 <자유신문> 12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한 지 불과 10여 일 뒤인 12월 4일에 불법연구회 대표 정산 송규(1900~1962)는 전북 익산으로부터 상경하여 백범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임시로 거처하고 있던 숙소를 찾아 임정(臨政) 지지를 표명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고, 이어서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하여 중국 장개석 정부의 군사적 지원 아래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잠시도 쉬지 아니했던 백범 선생. 그 백범 선생을 식민지조선 안에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위한 ‘제4의 독립운동’을 한시도 쉬지 아니했던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을 계승한 정산이 멀리 전북 익산으로부터 상경하여 찾아가 임정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이 극적인 만남을 달리 설명하자면, 항일무장투쟁의 최고지도자와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기축으로 한 제4의 독립운동 최고지도자가 극적으로 해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정산이 백범을 만나기 이전인 1945년 10월에 이미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조국의 앞날을 위하여 <건국론(建國論)>을 저술하여 정계 요인들에게 배포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백범과 정산 두 사람이 극적인 해후를 하는 과정에서 <건국론>이 건네졌을 가능성은 100%에 가깝다 할 것이요, 백범은 신생 조국의 앞날을 위한 방책을 ‘도도하게’ 펼치는 24세 아래인 정산의 높은 경륜과 탁월한 식견을 눈치 챘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건국론>만이 아니다. 정산이 이끌고 있던 불법연구회는 1945년 9월에 전재동포(戰災同胞), 즉 8.15해방을 맞이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동포들을 위한 구호조직을 결성하고 그해 10월부터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전북 전주와 익산 등지에서 본격적인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불법연구회의 활약상은 <매일신보> 1945년 10월 2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13개 원호단체, 조선원호회단체대회 구성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 안 각처에는 수만 호 원호단체가 뒤를 이어 설립되고 있거니와 경성에 있는 조선인민원호회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3천 만 겨레의 총력으로써 전재동포에 대한 더욱 힘찬 구제운동을 일으키고자 여러 가지로 극력 주선한 결과 9월 30일 오후 2시 반 경성 숙명고녀(淑明高女)에서 조선원호단체대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참가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구호동맹, 재외이재동포원호회, 불법연구회 구호부, 조선사회사업협회, 조선청년단 구호부, 고려동지회 구호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건준 후생부, 전재동포구호동맹, 불교단 구호부, 조선인민원호회, 건국부녀동맹, 경성실업자동맹 구호부  

위 기사에 따르면, 1945년 9월 30일 오후 2시 반 서울 숙명여고에서 전재동포구호를 위한 13개 원호단체가 참여한 연합체 ‘조선원호회단체대회’가 구성되었는바, 바로 그 13개 단체 가운데 하나로 ‘불법연구회 구호부’가 있다. 전재동포구호사업에 헌신하고 있던 불법연구회를 주목한 기사는 또 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12일자의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조선인민원호회 등 13개 단체 동포구호사업
해방 후 전재동포의 구호사업에 애를 쓰고 있는 단체는 다음의 13단체이다.
조선인민원호회, 조선구휼동맹,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려동지회 구호부, 조선국민 후생대, 조선청년단 구호소, 경성실업자동맹 구호소, 불법연구회, 조선이재동포구호회, 조선불교단, 경성대학 구휼부, 조선기독청년단, 조선기독청년단 안식교회

백범은 <건국론>에 담긴 신생 조국의 건국방략에 깊이 공감했다.(박정훈, <정산종사전>, 원불교출판사, 2002, 320쪽) 뿐만 아니라 위의 <동아일보>가 보도하고 있듯이, ‘전재동포 구호사업에 애를 쓰고 있는’ 불법연구회의 활약상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생일날 아침에 백범 선생이 불법연구회 서울출장소를 찾은 배경이며, 후일 백범 서거 소식을 접한 정산이 ‘통분함을 억제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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